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

사건의 지평선은 소송 과정에도 존재한다

by 윤반장

우주는 빅뱅 이후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그리고 팽창 속력은 거리에 비례한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 내 은하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거리가 멀어지는 속력이 더 빨라지기 때문에, 일정 이상의 거리만큼 멀어지면 그 속력은 빛보다 빠르게 된다. 따라서 지구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은하의 빛은 결코 지구에 닿을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하여 두 개의 세계가 분리되는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이 생기게 된다. '사건의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세계에서 발생한 일은 결코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은 물리적 이론에 따른 세계의 단절로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소송 절차에서의 세계의 단절도 존재한다.


책장과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 누구나 한 번쯤 TV를 통해서 봤을법한 판사, 검사, 변호사의 사무실 모습이다. 이처럼 법조인의 책상이 수많은 서류로 뒤덮이는 이유는, 수사 및 공판 단계에서 참고인, 당사자, 증인 등이 진술한 모든 말이 서류로 남고 이것이 차곡차곡 쌓여 '소송기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편철된 소송기록을 한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경찰에서 검찰로, 다시 법원으로 차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 과정에서 수사관, 검사, 판사가 변경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종전 수사관이나, 검사, 판사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서면으로 남아 소송기록에 편철되지 않으면 이후의 수사관, 검사, 판사는 그러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또한 서면으로 제출했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표현으로 기술하지 않은 경우 서면으로 전달하고자 한 정확한 뉘앙스와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각 수사절차와 담당자의 변경은 소송 과정에서 '사건의 지평선'과 같은 효과를 보인다. 서면에 정확하게 기술되지 않은 내용은 빛의 속도 이상으로 멀어지는 다른 은하에 닿지 못하는 것처럼 무력하게 점차 사그라든다(물론, 수사 과정의 영상 녹화, 녹음 등을 요청할 수 있지만, 시간적 한계로 인하여 녹화된 영상이나 녹음된 음성을 듣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반면에, 소송의 첫 단계에서 사건의 맥락을 정확하게 짚은 설득력 있는 서면은, 소송기록에 편철된 후 계속해서 다음 수사관과 검찰, 법원에 차례로 전달되면서 강력한 효력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전임자로부터 사건을 전달받은 수사관, 검사, 판사는 사건을 파악하기 위하여 시계열순으로 편철된 소송기록을 처음부터 살펴보는데, 처음 제출된 잘 정리된 서면을 통하여 해당 서면 작성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파악하게 된다. 이는 강력한 '앵커링 효과'를 발휘한다.


피의자로서 수사를 받은 경험이 많은 모 기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소송 과정에서 단 한 번만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면 첫 피의자 조사 전에 선임하여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여러 차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확한 분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처음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때에는 '별 일 있겠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조사를 받다가, 기소된 후 공판 단계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변호인을 선임한다. 검사는 이미 유죄를 받기에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후 기소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법원 단계에서는 검사의 논리를 탄핵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는 비단 형사 사건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민사 사건에서도 1심 법원에서의 첫 서면(원고의 경우 소장, 피고의 경우 답변서)이 가장 중요하다. 첫 서면 이후의 서면은 사실상 첫 서면의 논리를 보강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민사 사건에서도 단 한 번만 변호사를 선임한다면 1심에서 선임하여야 한다.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는 헤어진 연인 사이의 관계를 사건의 지평선에 빗대어 표현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연인들은 헤어진 후 서로 빛이 닿을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두 세계로 분리되어 각자의 세계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진 연인들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는 영원히 남는다. 결국 사람 사이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문서'로 남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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