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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Apr 23. 2024

인간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젓가락 가는대로 생각 없이 음식을 욱여넣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잠시 고민하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소화도 시키고 지근거리에 사는 엄마 얼굴도 보고 싶었다. 미적지근한 바람에 물기가 묻었다 싶더니 뚝뚝, 빗방울이 떨어진다. 발길을 돌릴까 잠시 망설이다 곧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아 가던 길을 갔다. 이런 밤이면 불쑥 친구 생각이 난다.


- 통화 가능하니?

- 응 잠깐.

- 학원이야?

- 응.

- 우산은?

- 비 와?

- 응. 몇시에 끝나?

- 10시 넘어서. 이따 전화할게.

- 나 일찍 자. 다음에 통화하자. 건강 잘 챙겨.

- 그래. 이따 전화 안 받으면 자는 걸로 알게. 너도 건강 잘 챙겨.


  K는 30년 지기다.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는 이 친구랑 만나는 건 일 년에 두어 번, 통화는 네댓 번이 다다. 고등학교 시절, 장기자랑 대회를 하면 어김없이 뽑혀 나가 이선희의 ‘J에게’, 장혜진의 ‘키 작은 하늘, 1994년 어느 늦은 밤’같은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이 친구는 독서실에서 늘 새벽 두시까지 공부를 했고 학교에서는 거의 종일 잠을 잤다.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열 받은 담임 선생님이 전부 다 책상에 올라가 앉으라는 단체기합을 준 적이 있다. 담임이 볼펜으로  손등을 쿡쿡 찔러도 K는 일어나지 않았, 일어나지 않는 이 친구 덕에 반 애들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담임이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담임도 어이가 없었는지 K를 자게 뒀고, K를 뺀 나머지는 한 시간 내내 자는 K와 담임의 눈치를 살폈다.

 취향도 관심사도 모두 달랐지만 나와 달리 외향적이던 이 친구는 점심시간이면 넉살 좋게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딱히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할 것도 없는 그런 관계를 맺었다.

 전화를 끊고 고등학교 시절 K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서로 다른 대학에 다녔고 생각해보면 특별한 접점도 없었던 우리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재밌기도 했다. 문득 대학 때 읽었던 노신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가 떠올랐다.

 노신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는 적절한 관계를 고슴도치 이야기에 빗댄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너무 멀면 온기를 나눌 수 없으므로 인간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참 적절한 비유라며 무릎을 쳤지만 유난히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던 내게 그 ‘적절한 관계’는 사실,  참 어려웠다.

 시장에 들러 엄마에게 줄 인절미며 찰떡을 몇 팩 샀다. 검은 봉지에 넣어준 떡을 흔들며 엄마 집으로 가는데, 거리에 알사탕 같은 전등이 알록달록 은은한 빛을 내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맺은 관계는 다 K와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입에 넣으면 둥글둥글해 어디 하나 찔리는 구석도 없고 은은한 단맛에 평온해지는 알사탕 같은 관계. 보통 10년은 다 넘은 관계다. 속속들이 서로의 사정은 몰라도 알만큼은 알고 일 년에 적어도 두어 번은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며 굳이 만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끈이 단단히 이어주고 있는 관계. 나는 그런 관계가 좋다.

 나이가 드니 관계도 자연스럽게 걸러진다. 직장에서는 가끔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받지만, 예전만큼 오래 담아두지 않으며, 상처도 금세 아문다. 고슴도치가 고슴도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만큼의 마음의 거리를 이젠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나보다.


 며칠 전 엄마가 카톡으로 만성질환 예방법이 담긴 영상을 보냈다. 엄마한테 처음 받은 카톡이다. 누군가가 보낸 카톡을 보고, 딸들에게 보내려 카톡으로 영상 보내는 방법을 배웠을 거다. 6분 정도 되는 영상이라 엄마에게 고맙다며 이따 보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네 시간 정도 지나 엄마가 카톡을 보냈다.

- 알어써.


 엄마는 자식에게도 평생 선을 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엄마를 유독 편하게 생각하고 의지하는데 더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관계를 포함한 삶 전반에 대한 엄마의 균형감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누구하고든 적절하고 담백한 관계, 군더더기 없는 관계를 맺는 엄마는 칩거한 손녀에게조차 반가운 할머니며 주말엔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지인들 때문에 얼굴 보기도 힘들 지경이다.


 엄마에게 떡을 주고 집으로 가는 길. 살랑 부는 훈풍에 나를 그들의 관계망에 엮어준 지인들이 떠올랐다. 여름이 오기 전, 아롱다롱 알사탕 같은 편안한 맛을 내게 선사한 그들에게 한 명 한 명 안부전화를 해야겠다. 건강 잘 챙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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