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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May 06. 2024

책이 주는 위로들

 얼마 전 학교 도서관에서 책의 날 기념행사를 했다. 책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문구를 포스트잇에 적어 붙이거나 책을 소개하는 문구를 써 보내면 마이쮸나 스낵 같은 간식을 주는 행사였다. 다독은 못해도 책은 가까이 하는 편이라 위화의 소설 중 <형제>를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보냈더니, 사서교사가 식당에 가는 나를 도서관으로 끌고 가 책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문장도 적어달라며 포스트잇을 건넸다. 행사상품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 벽면엔 학생과 교사의 마음을 움직인 문장이 이미 차고 넘쳤다.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레 눌러 쓴 글자들을 천천히 바라보다 시선이 멈췄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中


 책을 보다 보면 단순히 마음을 흔드는 걸 넘어 가슴을 관통하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사실 그런 문장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여 책을 놓지 못하기도 한다. 조용히 문장을 읊조려 봤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입술을 움직이며 누가 이 문장을 골랐을까 곰곰이 떠올려봤다. 굳이 교사의 필체가 아니더라도, 저런 문장을 남긴 이라면 깨지고 부서지며 닳아버린 마음에 지쳤던 이겠구나 싶었다. 그 마음이 뼈아프게 와 닿기에 부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이 이 문장을 고른 이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랐다. 거친 풍랑에 또다시 중심을 잃는 순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라는 문장이 금세 떠올라 흔들리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길.


 “실은 정답이 없다는 건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이다.” - 러셀 로버츠의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中


 정말? 죄 없는 문장을 잠시 쏘아봤다. 머리는 아프지만 정답이 없기에 삶이 풍부한 것 아니겠냐고 취기에 큰소리 뻥뻥 치다가도 삶이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답이 딱딱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나이가 들면 사는 게 좀 수월해질 거라 믿었지만 나이 들수록 내 앞가림도 못해 쩔쩔 매는 중년의 난, 노상 내뱉는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다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답이 없어 답답한 인생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니. 이런 문장을 고른 이는 아직 인생 쓴 맛 못 본 순진한 이거나 모진 인생 끝 달관의 경지에 오른 이이리라. 주저앉아 사는 게 힘들다 노상 투덜거리는 나로선, 감히 흉내도 못내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中


 나는 언제쯤 초연해질 수 있을까 씁쓸한 마음이 되어 눈을 옮긴 찰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문장이 나를 가만가만 안아준다. 지금 내가 갈피를 못 잡아 이리 저리 부딪혀 아픈 이유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기 때문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토닥여주는 손길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배어나오게 마련. 노력을 인정받으니 부족한 나도, 포기하고 싶던 나도 다시금 끌어안을 용기가 생긴다.


 종일 내리는 비 덕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만났다. 세상 시니컬한 사춘기의 콜필드가 쏟아내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들으며 앤톨리니 선생은 빌헬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쓴 글을 들려준다. 오늘 내게 들어온 문장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미성숙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위로받기 위해서다. 위화의 <인생>, <형제>와 같은 소설을 보며 삶은 본디 끝없는 고난의 연속임을 배우며 내 삶 또한 그저 평범한 삶에 불과하니 유난떨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수없이 흔들리는 인간들을 만나며 나 혼자만 모자란 게 아니 구나 위로받는다. 책이 없다면, 삶을 버틸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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