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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May 20. 2024

우리가 살아봐야 하는 것은 '빛으로 변하는 세찬 비'

- <고슴도치의 우아함>  르네에게.

 르네. 오늘 아침엔 내가 일하는 공간에 당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출근했어요. 당신과 비슷한 사람 말고 바로 당신 말이에요. 당신은 프랑스 어느 고급 빌라의 수위였죠. 남편과 사별하고 마뉘엘라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예술에 남다른 식견이 있는 ‘우아한 당신’은 고슴도치의 가시로 위장한 중년의 여성입니다. 언니 리제트가 예쁘고 가난했기에 부잣집 도련님에게 능욕을 당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판단한 당신은 ‘비슷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입 다문 자, 숨어 사는 자'가 되어 평생 '비밀의 길'을 걷습니다. 당신은 영리했으나 초라했기 때문이죠.


 한창 젊은 시절 폐경을 유도하는 호르몬제를 맞았던 적이 있었어요. 자궁에서 자란 혹을 제거하고 3개월 정도 생리를 멈추게 하는 주사제를 놓으며 머리가 하얗던 의사는 말했습니다. 갱년기를 미리 겪게 될 거라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참을 수 없는 한기와 별안간 치닫는 열기로 몸이 괴로웠고 마음은 끝도 없이 가라앉아 아무 데서나 뛰어내리고 싶었던 충동. 두 번째 주사를 맞기 위해 찾아간 진료실에서 의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죽고 싶어요.


 이십대에 겪은 갱년기 증세는 호르몬 주사제를 다 맞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사라졌지만 소량의 호르몬에 몸과 마음이 지배당한 경험은 신기하면도 두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르네. 쓸데없다 느껴질 얘기를 당신에게 줄줄이 늘어놓는 이유는 이 갱년기가 진짜로 찾아온 덕에 당신과 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순간순간. 삶이 부질없고 덧없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아무 데서나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건 아니지만, 삶이 온통 잿빛으로 느껴졌죠. 지난한 이어짐. 삶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리 미련 둘 일도 없다 생각했죠. 소중하게 여기던 오래된 모임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동네 엄마들과 갖는 시간은 지친 육아, 힘든 직장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나름의 힘이 되어 주었죠. 그 모임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명확한 이유는 없어요. 여느 토요일처럼 모임 장소로 가던 중 그저 발길이 도서관을 향했을 뿐입니다.


  자작나무여,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 ... ...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그러나 그래도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등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빚진 것도 없는 것들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능력이 그래도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서가를 채운 빼곡한 책 속에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저 심상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당신과 친구가 된 비상한 사춘기 소녀 팔로마가 먼저 말을 겁니다.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보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기분을 나아지게도 합니다. 공기 중에 스민 아카시아며 찔레꽃, 장미 향기, 여름날 숲에서 느껴지는 청량함, 가을날 밟는 폭신한 흙길 같은 것들에 마음이 순해지기도 설레기도 하니, 나라는 존재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가요?


  죽기 전에 살아 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렇다. 그걸 말해줄 수 있다. 죽기 전에 살아봐야 하는 것은   빛으로 변하는 세찬 비다.

  ... ... ...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니 살아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첫 장을 펼쳤습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삶을 꿰뚫는 당신의 통찰력에 놀라기도 하고 언니처럼 희생될까 두려워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스스로 저버리려 하는 당신 모습이 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용기를 내었습니다. 능욕당한 언니가 죽으러 집으로 돌아온 날 내리던 세찬 비. 가차 없이 쏟아지던 그 차가운 비는 평생 당신을 두렵게 만들며 당신 가슴을 얼게 만들었던 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마음의 빗장을 열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그 비가 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살아봐야 한다고. 정말로, 당신의 세찬 비가 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같이 맞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내 삶에도 덩달아 그런 기쁨이 찾아올 것만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당신에게 찾아온 연인 기쿠로와 여생을 보내지는 못합니다. 그의 마음을 받아주기로 결심한 바로 그날 아침, 차도로 달음박질치는 거지 제젠을 구하려다 트럭에 들이받힌 거죠. 인생이 참 얄궂더군요. 하지만 그게 삶의 속성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죽는 순간 함께 마지막 차를 들고 싶은 친구를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 느꼈습니다.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하는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는 세찬 비가 내리지 않아 가슴이 덜 아팠습니다. 누구나 죽지만 죽는 순간 떠올릴 친구가 있는 사람,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 아마 이게 인생일 거야. 숱한 절망,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시간이 더 이상 같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고.

  ... ... ...


 당신 친구 팔로마는 사실 자살을 꿈꾸던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벌어진 사고 소식에 심장이 절여진 것 같은 아픔을 느낀 팔로마는 그제야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소멸이며 돌이킬 수 없는 끝, 이라는 걸 실감하죠. 팔로마는 피곤하고 지친 기색의 기쿠로와 당신의 옷가지를 영안실로 가져가기 위해 수위실로 향하던 중 멈춥니다. 당신이 좋아했을 법한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던 거죠. 절망의 순간,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소리. 그 소리로 당신을 추억하는 아름다운 순간. 팔로마는 당신에게 자살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을 위해 절망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겠다고, 세계의 아름다움이 그것이라고 하며.


 딸이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기쁨을 맞을 준비가 된 날,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걸 끊임없이 요구하는 삶 앞에서는 자꾸 무력해지기만 했습니다. 호르몬의 영향인지 자주, 될 대로 되라며 널브러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후 아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죽음은 앞으로 있을 수도 있을 기쁨의 순간, 그 모든 가능성의 영원한 소멸이라고. 삶의 가치는 암흑 속에서 아름다운 빛을 찾는 일이라고. 당신의 이야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습니다. 나와 너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르네. 눈을 감는 순간, 당신처럼 마지막 차를 들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 순간은 누구나 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며, 이미 당신과 여러 차례 차를 마신 기분입니다. 그거면 됐지 싶습니다. 당신을 만난 덕에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 진 것 같아 기쁩니다. 당신을 만난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오래도록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다름 아닌 절망의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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