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의 초반부는 얼핏 보면 <귀여운 여인>과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다. 다만 <아노라>에는 사랑이 없고 계급상승의 욕망만 있다. 애니는 반야와 함께하며 그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자기 자신을 팔아서라도 그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반야가 도망가고 토로스 일행과 함께하며, 애니가 속한 곳은 굴욕적이고 처절한 노동자들의 세상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 길게 이어진 자극적인 파티 장면들은 이 대비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자본가의 세상과 노동자의 세상은 불합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르다.
반야가 퇴장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춥고 칙칙한 밤이 찾아오고, 남은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분투한다. 반야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소비 전문가고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지친 얼굴의 노동자다. 그래서 <아노라>를 보고 있으면 기이한 빈부격차가 느껴진다. 왜 누군가는 저렇게 쉽게 돈을 쓰고,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애니는 일주일 동안 반야의 여자친구로 지내며(물론 그건 여자친구 취급이 아니다.) 1만 5천 달러를 받는다. 2주 간의 결혼 생활이 끝난 뒤 받는 수수료는 다시 1만 달러다. 반야가 어릴 때 수영장 정수 시설을 망가뜨리고 지불한 금액은 6만 8천 달러였다. 애니의 삶을 뒤흔들고 그를 모욕한 대가는 수영장을 망가뜨린 것보다 싸다. 구체적인 금액을 매기면 그 가격표는 곧 애니의 가치가 된다.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법적인 보장인데, 아무도 애니의 의사에는 관심이 없다. 1만 달러를 지불할 테니 꿈에서 깨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아노라>가 꼬집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다. 그렇다면 현대 자본주의란, 무엇이든 값을 매겨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박함과 불합리한 빈부격차다.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는 이름을 잃고 익명성을 가진 도구로 전락한다. 아노라가 본명이 아닌 애니로 불리는 것은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고 일을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이고르를 제외한 누구도 아노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미국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는 그런 곳이다.
이고르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튀는 캐릭터이다. 이고르 역시 돈을 받고 시키는 일을 하지만 그는 마치 이건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자신의 삶은 할머니와 지내는 집에 있고, 이건 그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부업이라는 듯 행동한다. 돈을 받아도 영혼은 팔지 않는 듯한 이고르의 모습은 아노라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다면 <아노라>는 괜찮은 작품이다. 특히 엔딩 장면에서 지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노라는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노라는 이 결혼 소동으로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건 반야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결혼조차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자신에겐 인생을 바꿀 희망이었던 것이 반야에겐 일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중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인권마저 돈보다 가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노라>에는 일말의 사랑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굴욕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아노라>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션 베이커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이어 <아노라>도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그런데 <아노라>를 보고 나니 션 베이커는 성착취에서 여성혐오적 맥락을 읽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거나. 앞서 말했듯 <아노라>에서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는 돈으로 인간을 사는 자본주의다. 그래서 스트리퍼인 아노라와 자바로프 가문을 위해 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사실은 똑같은 노동자고, 모두 굴욕을 감내하며 돈을 벌기 위해 분투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그들은 같지 않다. 성착취는 노동이 아니고, 단지 자본주의의 부품인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깊고 오래된 여성혐오가 함께한다.
성노동자의 삶에 대해 보여준다기엔 이 영화는 션 베이커의 말대로 메일 게이즈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약자의 삶을 비춘다기엔 성적대상화가 가득하고, 그건 또다시 이 영화를 파는 요소가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션 베이커의 장점은 '판단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아노라>는 지극히 상업적이고 포르노적 시선으로 가득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조금이라도 로맨틱한 기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감독의 실패다. 자본주의와 노동에 대한 영화는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모순을 가진다. 션 베이커의 말대로 모든 영화는 노동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이 <아노라>를 만들었다니 몹시 실망스럽다. 이제 션 베이커가 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면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