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코코 Jun 09. 2024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4)

문학과 철학은 정치와 종교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

전편인 (3) 편에서 거론한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하여 추가로 의견을 올린다면, 최근에 내가 확인한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소설'에서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 빠져 있었다. 이런 사실은 타임지마저도 모비딕 작품이 100대 영문소설에 넣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내가 모비딕을 냉정하게 비평한 몇 가지 의견과 비슷하게 이미 타임지도 모비딕이 지닌 작품의 한계를 확인하고 인정한 셈이다. 이에 반하여 해럴드 블룸은 모비딕을 미국의 현대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았는데, 이렇게 해럴드 블룸과 타임지의 의견이 서로 갈리지만 나는 타임지의 의견이 더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해럴드 블룸과 미국의 일부 작가들이 보여주는 모비딕에 관한 애정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상 범위를 넘은 애국심에 따른 주관적 주장일 뿐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내가 전 편의 글을 통하여, 모비딕에서 많은 분량을 고래와 포경 산업의 전문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 매우 상세하게 열거한 방식에 관하여, 마치 어리석게 써 내려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방식에 관하여 거침없이 쓴소리를 한 이유는,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전문적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소설의 상당 부분을 억지로 채우는 행위는 단지 다른 전문 서적에서 그대로 베껴서 옮기기만 하는 되는 좀 이상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런 방식은 범한 사람조차도 쓸 수 있는 매우 손쉬운 작업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작가 입장에서 독자가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기 원한다면, 모비딕 안에서 읽어나가도록 장황하게 써 내려갈 것이 아니라, 다른 전문 서적을 통해서 더 깊은 지식을 얻도록 책 속에서 유도하는 방식이 더 현명한 방식이었다. 모비딕처럼 굳이 예술이라는 문학 작품 속에,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엄청난 부분에 걸쳐서 차지할 정도로 가득 차게 넣은 행위는 이 소설의 한계를  작가 스스로 자인하는 셈일 뿐이다. 여기에 이 작품은 유독 어려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독자가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하게 쓴 것도 그가 저지른 실수였다. 평범한 독자들이 이렇게 읽어나가기 괴로운 방식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연상케 하면서 의식의 흐름 기법이 가진 문제와 한계를 모비딕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가 혼자서만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은 어쩌면 독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은 행위일 수도 있다고 나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런 극단적으로 어렵게 쓴 방식의 책들을 보면서 해럴드 블룸이 선호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이유이며, 반면에 같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지만 책을 읽는 독자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편안한 글을 쓴 뛰어난 실력의 윌리엄 포크너를 위대한 작가라고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종교는 같이 하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아직 원시적이었던 고대 이전에는 거의 대부분 제사장이 고대 부족을 통치하면서 스스로 만능인을 자처하였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받아서 그 뜻을 부족에게 전달하는 전달자이자 정치 행위의 우두머리로 행동하였다. 물론 고대의 이런 행위는 지금의 시각으로는 고도의 사기꾼들이 앞장서서 행하는 사기극에 불과한 위험하고 어리석은 통치 행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종교는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명확한 영역이며, 여전히 미스터리 한 부분을 지닌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특히 종교는 나약한 인간에게 의지할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아무리 지식의 성숙도에서 앞장서 있는 사람이거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사람들조차도 생의 끝자락에서 대부분 종교를 찾아가서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이처럼 지식의 유무를 떠나서 인간이 나약하게 되면 종교의 힘을 빌리려는 습성을 가진다. 이런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종교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마지막을 지탱해 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주체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종교가 지닌 무서운 힘이다.


물론 종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여러 신비한 힘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힘으로 인류의 발전을 저해한 매우 불편한 존재이기도 하며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과 문학과 역사학은 종교를 뛰어넘는, 각자에게 주어진 제 역할을 다 해야만 한다는 것이 해럴드 블룸의 주장이다.  과거 중세까지는 종교는 정치의 영역을 담당하였는데, 단지 직업적 정치가가 정치 행위로만 통치를 하는 행위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종교의 힘이 강력하고 무한정하게 뻗어나간 중세 이전의 시기는 우리의 역사에서 암흑의 시기였고 답답시기였다. 종교는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도 지구의 다른 한 편에서는 종교의 힘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강력하고 무지한 힘이 발휘되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 정치인은 여전히 이런 종교의 힘을 빌려 목적에 이용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과 철학과 역사학은 과거의 이런 비합리적인 종교 행위에 대하여는 언제나 맞서서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그런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고 해럴드 블룸은 주장한다. 이런 거룩한 행위를 영지주의자들이 지금까지 외롭게 해낸 것이다. 물론 훌륭한 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의 이름으로 강력한 정치 집단에 맞서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종교는 이렇게 양면성을 지닌 강한 존재였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까지의 화가와 역사가와 문학가 등의 예술가와 학자들 거의 대부분은, 종교와 정치에 요구에 따라서, 앞장서서 나아가는 나팔수에 불과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정치와 종교에 맞서서 인류를 위하여 고독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종교가 더 무자비하고 하고 강력한 존재로서 영지주의자들을 핍박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과학자들도 넓은 의미로 말하면  영지주의자들이었는데, 지구는 둥근 존재라는 올바른 의견을 주창한 과학자 갈릴레오의 고통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의 험난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과거 역사를 파헤쳐보면 정치와 종교의 어둠에 맞서서 과학과 문학과 철학과 역사학은 죽음을 불사하고 정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특히 문학과 철학은 인류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의 역할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여러 관점에서 해럴드 블룸은 이슬람의 무함마드를 위대한 문학가 100인 안에 넣었다. 물론 무함마드는 직접 글을 쓴 위대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00인 안에 예수도 넣으려고 했지만 출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내 의견으로는 "예수는 종교라는 의미조차 전혀 몰랐고 종교의 힘조차도 관심이 없었던, 억울하게 우매한 정치가에게 죽임을 당한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거룩한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이용하여 예수를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계획하고 이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도 바울이 어쩌면 문학가 100인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해럴드 블룸이 위대하다고 내가 누누이 부르짖는 이유는 종교적으로 엄청난 존재이며 종교 자체이기도 한 무함마드를 100인의  위대한 작가에 넣었고, 예수마저도 100인에 넣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그의 용기 있는 고집과 집념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 순자, 장자 등 몽매한 인류에게 심오한 철학을 심어준 위대한 선구자들을 이 100인 안에 반드시 넣었어야만 했다. 중국의 철학자이며 유교 학자인 이들은 동아시아는 물론 시간을 지나면서 인류에게 불멸의 철학을 심어주었다. 해럴드 블룸도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인데, 그가 이런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제외한 것은 출판사와의 갈등이든, 그만의 고민에 따른 결정이었든 심각한 격론 끝에 제외한 것으로 추론된다. 다만 해럴드 블룸의 다른 저서에서는 이들 중국의 철학자들의 고귀한 의견들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이들 철학자들의 위대한 사상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 위대한 스승들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해럴드 블룸이 일본의 '무라사키 시키부'를 이 100인 안에 넣었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한 명 정도의 아시아 작가를 찾아서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넣은 행위라고 판단되는데, 이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방식보다는 위에 거론한 중국의 고대 철학자들을 어떻게든 반드시 넣었어야만 했다. 이들 철학자들은 무라사키 시키부와 비교한다면, 훨씬 더 심오한 인생을 살아온 가치 있는 위대한 성인들에 가까운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일본도 좋아하지만, 중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철학자들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내 고뇌의 밑바탕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 철학자들은 유럽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견줄 수 있는 고매하고 위대한 성인들이며 인류가 영속하는 한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로 반감될 수 없다. 내 의견으로는 해럴드 블룸이 일본 작가 한 명을 굳이 100인 안에 넣으려고 계획했다면, '무라사키 시키부'보다는 차라리 '나쓰메 소세키'를 넣는 것이 더 현명했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정신적인 영웅이며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걸출한 최고의 작가이다. 그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은 지금의 시각으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그 시기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쓰메 소세키는 매우 뛰어난 작가이다. 아직 보잘것없었던 암흑의 시대에도 이런 작가를 지녔던 일본이 부러울 뿐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정치와 종교는 실제로 한 몸처럼 움직였다. 유럽에서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동아시아에서는 유교, 서남아시아와 북 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에서는 이슬람교가 정치를 아우르면서 공존한 상황이었다. 원래 정치가는 그들이 목표한 지향점에 반한 상대에 대하여, 그가 누구든 강한 압박을 사용하는 행태를 서슴없이 행하였는데, 사실상 과거의 종교 지도자들마저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비도덕적인 행태는 역사가들의 기술을 통해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하여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여전히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토록 심한 대우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 종교를 통하여 예를 들면, 과거는 물론 지금도 가톨릭의 종교 안에서 외롭고 힘들고 경건하게 살아간 고귀한 수도사들의 거룩한 삶의 흔적, 낮은 곳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던 많은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의 위치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에 과거는 물론 지금도, 상위에 있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부도덕한 행태는 종교가 던지는 어둠의 그늘을 사정없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종교의 문제에 대하여 문학과 철학은 강력하게 반항하는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데, 무조건 종교의 삶 속에서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문학가가 있다면 그는 작가가 지녀야 하는 고뇌의 시간을 잃어버린 3류 작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작가들이 바로 허먼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헤르만 헤세 등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심각하게 종교에 의지하는 행태가 없었는데, '악령'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극단적으로 종교에 귀의하여 살아야만 한다고 내내 주장하고 있다. 위에 거론한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오직 종교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만이 올바른 삶이라고 강조했는데, 실상은 그조차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길인지도 잘 모르면서 아무런 고민 없이 무조건 종교적 가르침을 판에 새기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죄와 벌'은 종교의 가르침에 갈등하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나약한 한 젊은이를 잘 그린 수작이지만, 위에 거론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은 종교에 푹 빠져서 헤어져 나오지 못한 다소 부족한 작품들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해럴드 블룸도 같은 의견을 펼치면서 종교에 심하게 빠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적 결함을 지적하면서 우매하다고 평론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종교적 그늘 속에서 깊이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쉽게 읽어나가기 좀 어려우면서, 마치 모더니즘 작가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들을 알면서도 해럴드 블룸은 그의 저서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칭찬하였는데, 차라리 '죄와 벌'로 칭찬했어야 마땅했다. 여기에서도 해럴드 블룸의 잘못된 선택이 드러난다.


나는 '영지주의'를 문학으로 옮겨온 그의 결단을 깊이 이해하고 높이 사면서  동시에 종교의 강한 영향력이 문학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저해하였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학의 사상이 아직 미개했던 중세 시대까지는 종교의 힘에 눌려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근대와 현대에 넘어와서도 종교에 의지하여 글을 쓰는 작가들이 너무 많았는데 위에 거론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헤르만 헤세' '허먼 멜빌'등이 그런 범주의 작가들이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그가 중세시대의 작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종교의 영역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평소 해럴드 블룸의 확고한 의견은, 문학은 종교의 영향력에 완전히 자유로워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당연한 의견에 나도 물론 동의한다. 이 의견은 작가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의지의 철학인데, 이런 확고한 철학을 지니지 못한 문학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헤르만 헤세와 동시대에 살았던 같은 독일의 토마스만은 종교의 영향력을 거부하였다. 그의 '마의 산'에서 종교는 이 작품 속에서 흐르는 단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가 쓴 대부분의 책에서는 마치 종교인이 책을 쓴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 사상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이런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영국의 조지 엘리엇조차 그녀의 저서에서 종교인을 단순히 하나의 직업인으로만 인정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어두운 시대의 한 나약한 여성이었지만 조지 엘리엇은 종교의 힘에 눌리지 않고 강하고 대담하게 그녀만의 의지를 지켜나갔다. 또한 톨스토이와 플로베르가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라는 사실은, 그들은 문학이 정치와 종교에 종속되기를 거부하였고 심지어 그들의 책에서는 종교의 가벼운 일상조차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저서에서는 온통 종교에 몰입하여 모든 일을 종교에 의지하여 행해야만 한다는 비합리적인 철학을 완곡하게 전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종교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하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가르치신 은사님 때문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처음 접했다. 그때에는 나도 어려서 서양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단지 데미안이 심약한 싱클레어를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내용에만 관심이 갔다. 그런데 내가 약 6개월 전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지독하게 종교적 삶에 의지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이 책에 대하여 무척 답답하고 괴로웠다. 헤르만 헤세, 그는 단지 기독교에만 의지해서 살면 모든 게 다 해결되고 걱정 없는 인생이라고 설파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였다. 그런데 위에 거론한 바와 같이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같은 독일의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종교는 단지 한 직업의 일상 행위라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전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 모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헤르만 헤세가 훨씬 뒤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헤르만 헤세는 아직 중세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토마스 만은 종교에 대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현명한 작가였다. 문학가가 종교에 의지하려면 굳이 문학 작품을 쓰면서 애쓰지 말고 그냥 종교인이 되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문학이나 철학은 시대를 뛰어넘는 고매한 영지주의가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학과 과학은 절대로 정치와 종교에 의해서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정치와 종교에 끌려다니고 이용되는 순간, 이들이 지닌 학문적 가치와 의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정치와 종교는 합리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향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자기 휘하에 끌어들이고, 이용하려고 노력하는 목표 지상주의자들이다. 문학과 철학은 이들을 가르치고 현명한 길로 안내하는 선구자여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가가 그의 작품 속에서 정치와 종교에 휘둘려서, 그들의 보좌역을 자처한다면 이미 그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작가들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허먼 멜빌의 모비딕,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런 종교적 한계를 지닌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앞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적 결함에 관하여 냉정하게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작가들도 많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그런데 누군가 한국에서 나름 빛나는 작가를 추천하라고 나에게 주문을 한다면 나는 한강 작가를 주저 없이 거론하고 싶다. 한강 작가에 대하여는 진정한 마음을 다하여 대단한 작가임을 이 글을 통해서 내 의견을 밝혀둔다. 그녀가 맨부커상을 받았기에 단순히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나는 채식주의자 작품은 그녀의 다른 책들에 비하여 좀 부족하다고 느낀다.(물론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녀의 다른 작품,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 등을 읽어나가면서 그녀가 고뇌하는 삶과 철학에 나도 같이 깊이 느끼면서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녀는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시대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 진정한 문학가이며, 나약한 자들을 위하여 가슴속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진정한 용기를 지닌 훌륭한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너무 슬퍼서 가슴이 한없이 시려온다. 그래서 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쉽게 못 읽는다. 그녀는 슬픈 작품에 몰입하는 실력이 있는 대단한 작가이다.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외로운 역사적 의무에 관하여 끝없이 고민하는 한강 작가를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작가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그녀는 정치는 물론 종교에 대하여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더구나 험악하고 무자비한 정치의 영역과 한계에 대하여 과감하게 소신 있는 의견을 개진하는 행동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한강이라는 뛰어난 작가를 보내준 그녀의 노력과 의지에 찬사를 보낸다.









작가의 이전글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