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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물감각 Mar 02. 2024

 에필로그-묘비명 단상

생(生)의 마지막 디저트, 샤토 디켐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기 사이로 끝없이 난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 함형수가 청년 화가 L에게 바친 <해바라기의 비명>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해바라기를 통해 인습에 대한 강한 거부 의사를 표명한 싱그러운 시입니다. 젊은 시절 제가 좋아해서 즐겨 암송했던 작품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안동 지방은 유교적 전통으로 항상 엄숙함이 지배했습니다. 무덤 또한 그런 풍경으로 다름 아니었습니다. 묘비명은 어려운 한자로 뒤덮여 있고 비석은 죽은 자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무게감으로 사람들을 압도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함형수의 이 시는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묘비명이 재미없고 권위적이고 읽기도 어려운 것이라는 관념을 깨준 계기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비석에서 묘비명이 이렇게 멋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구는 나의 인생 좌표가 되었습니다.

묘비명으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일 것입니다. 명언 제조가로 명성이 높은 그의 풍자적이고 촌철살인적인 경구는 묘비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나 나는 마르셀 뒤상의 묘비명이 버나드 쇼보다 더 차원이 높은 풍자와 위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작가라면 단연코 뒤샹이겠지요. 2004년, 아티스트ㆍ큐레이터ㆍ갤러리스트ㆍ비평가 등 영국의 미술 전문가 500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20세기 현대미술 작품'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을 선정했으니까요.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 시대의 아티스트에게는 뒤샹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현대미술이란 바로 다름 아닌 뒤샹의 아트입니다. 1917년에 <샘>이 등장한 이후 미술을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고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터무니없이 난해하고 독선적이기도 하지만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20세기 중반 이후 작품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변혁시켰습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그로테스크한, 성적인, 변태적인, 심지어 폭력적인 작품도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뒤샹의 묘비명은 그의 업적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묘비명은 그 인생을 드러낼 수 있어야 유효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 마음속의 묘비명은 공초 오상순 시인입니다.

대학시절 여자친구와 함께 수유리 화계사에 갔다가 우연히 들른 공초 오상순 시인의 묘소는 찾기가 쉽지 않은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숲 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정사각형의 화강암의 묘비명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화가 박고석이 공초의 안빈낙도의 삶에 어울려야 한다며 고인의 시 <방랑의 마음> 첫 연의 시구를 제안하고 서예가 김응현은 한글 예서체로 정사각형 화강암이 가득 차도록 무척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빗돌을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


사진 출처 은인자중님


시인의 호 空超는 담배꽁초를  지칭한다는데요. 그는 전설적인 애연가여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담뱃불을 꺼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도 심지어는 세수할 때도 불붙은 담배를 옆에 두었다고 당시 지인들이 증언했습니다.


나는 묘비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묘지나 묘비명이 없이 깨끗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라지는 것이 꿈입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습니다. 묘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에서부터 묘비명의 번역이 오역이라는 설까지 나돌고 있지요. 버나드 쇼는 사후에 화장되어 그가 살던 집 주변에 유해가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묘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묘비명은 쇼가 죽기 전에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역에 관해서는 '우물쭈물하다가'라는 번역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오래전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암튼 저 묘비에 적힌 원문은 이렇습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만큼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박명숙 번역)


-어정대고 있다 보면 내 이리될 줄 알았지.(조주연 번역)


버나드 쇼는 장수했지만 죽음은 언제나 아쉬움과 슬픔을 던집니다. 쇼의 느낌대로 삶과 죽음을 통찰하는 위트로 본다면 이 번역이 다소 문제가 있겠지만 이 시대 대중들의 감수성으로 읽힌다면 자기 성찰적인 번역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무덤도 묘비명도 남기지는 않겠지만 죽기 전에 꼭 마시고 싶은 와인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나 하나가 죽더라도 사회는 영속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사회는 구성원 한 명만 잃는 게 아니다. 사회는 자기 삶의 원리와 자기 신념에 타격을 입는다.


로베르 에르츠의 말입니다. 에르츠에 의하면 사회는 자기  존재의 영원한 근거와 끈질긴 생명력을 구성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지니기 때문에 죽음의 의례는 복잡한 사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죽음의 의례는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죽음은 이제 하나의 사라짐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죽음은 사회 존속화와 상관없이 간소화된 의례로, 사적인 사건으로, 즉 개인의 내밀한 경험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편의를 향해 죽음 표상이 나아갔던 문화적 진보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도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경험의 하나로 임종 때  마실 와인을 골라봅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와인으로 샤토 디켐(Chateaux d'Yquem)을 선택했습니다.


이 와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와인입니다. 장기 숙성력이 좋아서 50년 이상 보관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처음에는 밝고 노란 황금색을 띠고 있다가 점차 호박색(amber)으로 진하게 변해가는 모습은 인생의 노화 과정을 보는 듯합니다. 입에서 녹는 듯한 강력한 단맛을 지닌 디저트 와인으로 보르도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입니다. 소테른 지역은 가론강이 시롱강이 되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역에 위치한 덕분에 두 강의 온도차로 인해 새벽안개가 끼고, 안개는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 귀부균)가 포도에 달라붙게 만듭니다. 이 균이 햇살에 의해 번식 활동이 왕성해지면 포도 껍질을 뚫고 과일의 수분을 흡수해 단맛만 남는 쭈글쭈글한 알갱이가 형성됩니다. 이렇게 특별한 포도로 만들어진 스위트 와인을 귀부(貴腐) 와인이라고 합니다. 썩는 것이 고귀하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처럼 와인의 보석입니다. 그중에서도 샤토 디켐은 세계 최고의 귀부와인으로 명성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명성의 비결은 철저한 통제와 엄격한 관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귀부화된 포도알 하나하나를 선별해서 수확하는 것은 기본이고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불과 한 잔 밖에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중합니다.


귀부와인의 맛의 포인트는 단맛이 느껴지는 방식에 있습니다. 좋은 귀부와인일수록 열대 과일향을 중심으로 복잡하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은, 당도 자체보다 완벽한 밸런스의 절묘한 조화에서 오는 깔끔한 달콤함이 시음자를 진정 행복으로 이끕니다.

어쩌면 사람의 일생은 태어나서부터 점차 노화되어 가는(썩어가는) 것이 하나의 사이클이라면 어떻게 어가는가로 인간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와인처럼 고귀하게 나이 들어가는 면모를 보인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도 샤토 디켐을 통해서 내 삶을 회고해 보고 완전한 죽음에 이르고 싶습니다. 완전한 죽음이란 그 죽음이 최종적인 완성으로서 마감하게 되는 한 일생을 닮은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고 미셸 투루니에는 말했습니다.


유명한 일본만화 <신의 물방울> 마지막 권에서 1976년 산 샤토 디켐은 유산을 남긴 칸자키 유타카의 해석으로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젊은 날의 나는 혈기왕성하게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해쳐 나왔다. 나이 들어서는 대지를 다지듯 꾹 밟고 앞으로 나아가 , 때로는 벽을 오르고 비탈길을 내려가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했다. 황혼을 맞이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발자국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발자국. 60년의 세월은 찰나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와인으로 인생의 길고도 짧은 꿈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름답고 슬픈 추억으로 아로새겨진 인생의 매듭을 샤토 디켐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와인에서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놀라움과 매혹입니다. 샤토 디켐은 내 인생의 마지막 디저트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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