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겪게 되는 것
밤 10시 30분 세탁기가 멈췄다.
전업주부로 텃밭농사 중인 나의 하루 마무리는 그날의 빨래를 돌리고 탈탈 털어 너는 일이다.
예전 세제광고에서처럼 "빨래 끝!"이 "오늘 일과 끝!"의 동의어처럼 나에게 빨래를 너는 일은 꽤나 중요해서 신랑이 옆에서 털어주는 일도 마다하고 혼자서 열심히 의식을 치르듯 지내왔다.
결혼해서 쌍둥이를 임신하고 아이사랑 세탁기를 사야 하나 장고 끝에 기존 세탁기를 없애고 가장 큰 용량으로 산 21kg 드럼세탁기는 니의 최애 가전 베스트에 늘 꼽혔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외할머니네 외박하러 가서 이불이나 빨자 싶어서 일반 빨래를 한번 잘 돌리고 이불을 한번 더 돌리고 마무리하자 했는데 갑자기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해서 가본 세탁실에는 갑자기 멈춰서 전원이 꺼져버린 세탁기가 물에 잠긴 이불과 함께 나를 보고 있었다.
수리접수를 하려고 모델번호를 찾아서 적다 보니 제조년일이 딱 11년 차가 되는 모델이었다.
그 어떤 사전 전조증상도 없이 작동 중 전원이 나가버린 세탁기를 보며 당황스럽기도 했고 이걸 어쩌나 순간 좀 고민이 됐다.
탈탈 세탁물을 털어 각을 잡아 널어주는 동작에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나로서는 건조기를 살까 말까 가 늘 고민이 되었는데 세탁기 고장 나면 일체형으로 바꿔야지 하고서는 막상 고장 난 세탁기를 마주하곤 고쳐야겠지 싶은 거다. 나는 역시나 간사한 사람이다. 물론 새 세탁기가 적은 돈도 아니기도 하지만.
지난 11년간 잔고장(?) 하나 없이 매일 저녁 나랑 동행해 준 가전인데 한 번은 고쳐보자 싶기도 하고.
다행히 주말을 제외하고 월요일에 바로 a/s접수가 가능하다고 하여 접수완료.
쓰다 보면 고장이 나는 건 소모품인 모든 것들의 숙명일 텐데 기계도 사람도 그저 무탈하게 잘 운영되는 걸 감사하지 못하고 어느 날 고장 나버린 상황 앞에서 허둥지둥 댈 뿐이다. 누구라도 소모하지 않으며 살지 못하니 고장도, 병명도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결과인데 한편 느닷없지 않은 게 없는 것이다.
고작 한밤중 고장 나버린 세탁기가 내 삶에서 큰 문제이랴. 앞으로 더 느닷없는 일들은 대기표를 들고 나를 찾아올 텐데.
세탁기가 잘 돌아가면 감사하고, 병원서 연락 오지 않아서 감사하고, 주기적으로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다시금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