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흘러내릴 것 같은 날이다. 라테 라테 87년 라테. 국민학교 때, 아버지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술이 거하게 취해 들어오셔도 꼭 저녁밥을 찾은 터라 엄마의 핀잔과 잔소리에 귀가 따가웠지만, 아버지 밥 상 저만치에서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 손에 들려온 검은 봉지를 소란스럽게 열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더운 여름이면 물에 말은 밥에 된장찌개를 떠 드시거나 신김치를 얹어 드셨다. 소시지나 찾던 어린 시절 무슨 맛이 있어서 저렇게 드실까 싶었는데 반백살이 가까워지니 그 소박하고 단조로운 참맛을 알 것 같다. 여하튼 검은 비닐 봉다리는 마법 상자 같았다. 아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빨간 보따리라고 해야 하나. 어떤 날은 아버지의 최애 센베과자가 있었다. 생강가루가 붙은 센베, 김이 뿌려진 샘베.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센베를 골라 생강가루를 털어 먹었다. 어떤 날은 떨이로 사 온 못난이 과일들, 어떤 날은 지금도 최고가 아이스크림인 ‘까먹는 아이스크림 액설런트’가 있었다. 그리고 봉다리가 조금 큼지막한 날은 ‘통닭’이 있었다. 아버지는 물 말은 밥을 드시고는 골아떨어지셨고, 우리는 아버지의 선물 보따리를 열어 행복한 야식시간을 가졌다.
“아부지! 병원 다녀오셨어요?”
“야! 오늘 드디어 졸업이야.”
두 달간의 길고 긴 통원치료는 드디어 끝이 났다. 아버지의 상처는 잘 아물었다고 한다. 피부이식 수술을 했던 자리를 매일 소독하느라 외상반창고를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약한 피부가 자극을 받아 두드러기가 났었다. 아버지는 알레르기 약을 바르고 드시고 하면서 길어진 통원치료 기간을 지루해하셨는데 이쯤 되니 인간승리가 아닌가 싶다. 별 거 아닐 것 같은 상처로 시간이며 돈이며 엄청 비용을 치르게 되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던 치료가 끝이 나니 속이 후련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 목소리가 무척 흥분되었다.
“혼자 축하라도 하려고 맥주를 사 왔어.”
“맥주?”
“두 달 동안 금주했잖아. 아! 오늘은 한잔 마셔야겠어.”
그간 마음고생 몸고생이 말도 못 하셨던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6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나 산행을 다니시고 산자락 밑 맛집에서 반주 한 잔씩 하시는 게 낙이었는데 두 달을 옴짝달싹 못하셨으니 좀이 쑤시기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 맥주에는 통닭을 드셔야지. 제가 시켜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뭘, 또 시켜?”
“아니에요. 아버지 그동안 수고하셨는데 제가 맛있는 걸로 시켜드릴게.”
두 달의 퇴근길, 늘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게 습관이 되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하자마자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면
“또 칼퇴냐? 너네 회사 좋네.”
라며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두 달 동안 안부전화를 드린 게 아마도 내 평생 아버지께 안부전화를 드렸던 횟수보다 많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내가 걱정을 하면 괜찮다며 성급히 전화를 먼저 끊으셨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하셨다. 아버지 상처에 물이 차 올라 재수술을 했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잘 드시라고 했다고 들어 단백질파우더며, 닭가슴살, 고단백 두유, 커큐민영양제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시켜드릴 수 있는 건 다 시켜드렸다. 옆에 있는 게 제일 도움이 됐겠지만 사정이 그럴 수 없으니 자식 된 도리를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배달앱에 접속했다. 마침, 만원 할인 쿠폰을 받아 저렴하게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운전 중’이었다는 것. 신호에 걸릴 때마다 재빠르게 메뉴를 검색했다. 새로 나왔다고 하는 ‘장각구이’를 시켜야 만원이 할인된다는 것 같았다. 잘못 본 것일까 싶었다.
‘장작구이겠지.’
운전 중에 본 것이기에 확신하지 못했다. 주문을 하려는데 ‘멕시코 풍의 뭐라뭐라…’ 적혀 있는 걸 언뜻 보았다. 안 되겠다 싶었다. 오리지널로 시키는 게 낫지 괜히 어르신들 입맛에 안 맞으면 애꿎은 돈만 날리겠거니 해서 메뉴를 바꾸었다. 분명, 오리지널 맛과 제로콜라 1.25L.
집에 오니 찜통 같았다. 에어컨을 얼른 틀고,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두부 두모와 호박 두 개, 양파, 파뿐이었다. 참! 어제 먹던 훈제 오리도 있었다. 그리하여 해안을 낸 것이 오리 볶음밥. 갖은 야채와 어제 먹다 남은 훈제 오리를 다지고 볶아 계란을 덮어 오므라이스를 완성해야지라며 부엌에서 한창 바쁜 와중에 큰 녀석이
“엄마! 치킨 먹고 싶다. 통닭 말고, 맛있는 치킨.”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먹성이 워낙 좋아 치킨을 시켜준 적이 별로 없다. 두 마리에 17000 원하는 옛날 통닭을 사줘야 배라도 든든하니 그렇게 타협을 보았다. 감질 맛 나는 비싼 메이커 치킨은 구경도 못했다. 아주 가끔 카톡으로 선물쿠폰을 받은 경우나 먹을 수 있었지 내 돈 내산으로는 몇 만 원씩 치킨에 쓰기가 아까웠다. 만 원짜리 쿠폰이면 대단히 절약할 수 있는 기회인데 두 마리도 시킬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돈 몇만 원이 뭐 대수냐 싶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손이 오그라드는 게 사실이니 꾸역꾸역 볶음밥을 열심히 만들었다.
“얘들아! 밥 먹자!”
아이들이 오므라이스를 보더니 케첩을 들어 멋들어지게 계란 위로 빨간 수를 놓았다. 엄지를 들어 올리며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중에 치킨 꼭 시켜줄게'
땀을 닦으며 나도 한 술 뜨려는 찰나
분명, 오리지널을 시켰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앱에 있는 주문내역에 들어가 보았다. 만원 할인받아 12400원 결제되었고, 오리지널로 찍혀 있었는데 멕시코 풍의 장작구이로 간 것이었다.
볶음밥을 먹는 내내 사진을 열 장 정도는 보내신 것 같다. 큼지막한 크기의 닭다리.
작년에 담낭 제거술을 받으시고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조심해서 드시는 엄마가 드셔도 되는 구운 치킨이라 고른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 장작구이라 맛도 좋을 듯싶었다. 기름기도 없겠지 하고...
엄마가 문자와 같이 사진을 보내셨다. 상자에 분명 '장각구이'라고 쓰여있었다. 미심쩍어 찾아보니 '장각구이'가 맞았다. 추성훈 아저씨가 광고하는 멕시코 풍의 바비큐 소스를 더한 이국적인 맛의 두툼한 '긴 다리'를 뜻하는 '장각'이라 하여 넓적다리와 닭다리가 붙어 있는 큼지막한 크기의 새로운 메뉴란다.
장작구이로 알고 드신 장각구이.
장작이든 장각이든.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의 검은 비닐 봉다리를 기다리던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이제 반백살이 되었고, 아버지께 장작구이 치킨도 사 드릴 수 있을 만큼 많이 컸다. 비록, 치킨이 먹고 싶다던 딸들은 앞에서 훈제오리 볶음밥을 먹고 있지만 만 원짜리 할인쿠폰은 번지수를 잘 찾아간 것 같다. 가끔 나도 아버지의 검은 비닐 봉다리가 되어드려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