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는 직선으로 자란다.
이에 즉각 반박하며 아니 오이는 둥글다 혹은 굽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이를 그 성격상 직선이라 부르고 싶다. 비단 열매뿐이 아니라 줄기도 그렇다. 당연히 구불구불한 덩쿨손이 나와서 여기저기를 부여잡고 나아가기에 결코 완전무결한 직선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수형만 잘 잡아주면 오이는 얼마든지 수직으로 기어올라가 대략 직선의 열매들을 뻗어낸다.
오이를 화분에서 수직으로 수형을 잡아 기르기도 하고, 선반에 올려서 덩굴줄기를 밑으로 늘어뜨려 기르기도 하며 알게 된 것은 두 경우 모두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뿌리를 아래로 해서 수직으로 길러내는 오이 또한 밑보다는 위에서 더 열매가 많이 열리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반에 올려둔 화분에서 밑으로 줄기를 늘어뜨리며 자란 오이조차 높은 곳에 열매를 맺는 것은 생각지 못한 발견이었다.
원래 오이란 녀석은 높이를 골라서 열매를 맺는 건가? 곧 생각해 낸 나름의 추측은 이러한 생장이 아마도 열매의 모양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얇고 길쭉한 형태의 오이는 다른 채소들 보다도 더욱 높은 곳에서 밑으로 열매를 늘어뜨릴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덩굴줄기처럼 뻗어 겉모양이 얼추 비슷해 모종시기에는 구별이 모호한 수박과 참외에도 이르게 되었다. 모두 내 정원에서 길러본 적이 있고, 현재 오이와 참외를 함께 기르고 있기 때문이다.
원줄기에서 열매를 맺는 특성 때문에 오이를 잘 알고 기르는 사람들은 그에 적합한 순 지르기, 곁순제거를 해준다. 오이가 원줄기에서 열매를 맺는 것과는 달리 수박은 아들줄기에서, 참외는 손자줄기에서 열매가 맺힌다. 때문에 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 조건에 맞는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이는 밑부분의 오래된 잎들과 주변 줄기를 제거해서 원줄기의 성장에 힘을 더해주고, 수박은 원줄기를 잘라 아들줄기가 잘 뻗어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식이다. 당연히 아들줄기에서 열매가 나니 손주줄기는 제거해서 열매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 보조한다.
수박처럼 커다란 열매는 무거워서 줄기가 버티지 못하니 오이처럼 마냥 위로 뻗어갈 수가 없다. 대신에 여타 다른 호박처럼 바닥에서 기어가며 열매를 키운다. 참외는 손주 줄기에서 열매가 맺히니 수박이나 오이처럼 곁순제거를 했다간 자칫 수확 없는 한 해를 보낼 수도 있다. 참외는 수박처럼 큰 열매를 맺진 않지만 대신에 여러 개의 작은 열매를 멀리 퍼뜨리려 손주줄기에서 열매가 맺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초록이 일 때의 겉모습과 노랗게 핀 꽃조차 비슷해 보여도 그 열매에 따라 생장하는 방식은 서로 아주 다르다.
싹이 트고 본잎이 나고 첫 꽃이 필 때까지도 뭐가 오이인지 뭐가 참외인지 모를 만큼 비슷해 보였었기에, 왜 이건 더 잘 자라고 저건 더딘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었었다. 나는 어쩌면 너무 성급하게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떠한 열매를 맺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네 저러네 판단하고 조급해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식물에게 쓸데없는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내는 매일매일과 순간들을 누군가의 잣대에 비추어 효율적이지 못했다 혹은 낭비였다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은 내가 맺을 열매의 크기와 모양에 가장 적합하고 또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의 열매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각자의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