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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Jul 03. 2019

[월간 안전가옥] 5월 by Hayden

#월간안전가옥 

연습은 멋이 없다. 그러나 무섭다.

[월간 안전가옥] 5월 by Hayden


‘망했다고 봐야지.’


오늘 눈을 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였다. 오늘 나의 오전 계획은 출근 시각인 오후 두 시 전에 시립미술관에서 느긋하게 호크니의 전시를 보고, 근처에서 무려 한 시간 동안 아점을 먹은 후 더욱 느긋한 걸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었는데. 아홉 시면 느긋함 따위 이미 부지런한 새가 물어 가고 없을 시간이었다. 느긋함이 없는 오전 시간은 지옥과도 같다고 생각하는 나는 ‘오늘만 날인가.’ 했고, 나와 동행하기로 한 J는 ‘나도 그 생각엔 동의하지만 그건 주로 내 대사인데.’ 했다. 결국 J와 나는 오전 커피를 포기하고 전철에 올랐다. 오전 열한 시가 안 되어 시립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손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 뒷머리가 납작한 것 말고는 별다르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전시장은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으로 붐볐다. 미술관 앞 포토존에는 이미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만 날도 아니었지만 오늘이 날인 사람들도 이렇게 많구나, 생각했다. 무거운 짐을 락커에 넣고 덩달아 가벼운 마음이 되어 전시장에 들어섰다. 

전시는 약 일곱 개의 테마로, 전시장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판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동명의 원작을 재구성한 판화 작품과 성과 사랑에 관한 다수의 작품이 전시의 문을 열었다. 대표작을 보기 전까지 워밍업은 그리 길지 않았다. 햇빛과 자유로움이 흐르는 로스앤젤레스. 이 도시에 매료된 호크니의 대표작 <bigger splash,1967>가 곧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의 전시를 감상하며 감탄하는 일이 뭐 대수겠냐마는 나는 여러 번 감탄했다. 테마마다 한 사람의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변화 흐름을 보면서 전 생애에 걸친 그의 실험 정신에 감탄했다. 특히 마지막 테마인 ‘호크니가 본 세상’에서는 벽에 씌어있는 테마 설명글을 읽고 뒤돌아 섰을 때, 생각지도 못한 스케일의 작품과 퍼부을 듯이 강렬한 색채가 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많은 관람객들이 참새처럼 앉아서 그의 대형 작품을 오래도록 감상했다. 특히 호크니의 2인 초상화 시리즈가 걸려 있던 전시장은 공간과 작품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다수가 오래 머물렀다.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참고로 호크니의 전시는 전에 보았던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 되돌아갈 수 없다! 이런.) 그의 화풍에 큰 전환점이자 그의 대표작 <bigger splash>가 걸려있던 ‘로스앤젤레스’ 테마가 있는 전시장으로. <bigger splash>가 아니라 그의 습작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bigger splash>를 완성하기 전 호크니가 했던 실험들, 물을 표현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했던 호크니의 노력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세밀한 관찰이 필요한 ‘물’이란 어려운 소재를 다루면서 순간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기술적인 노력에 몰두했다. 세밀하고 꼼꼼한 묘사를 통해 수주에 걸쳐 물의 형태를 그려낸 호크니는 우연성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는 당시 유행하던 액션페인팅 양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순화된 형태와 평면성을 강조한 이 작품은 당대 회화적 장면의 인공성을 부각하는 작품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호크니는 <bigger splash> 속 ’첨벙’하는 물의 형태를 묘사하는데 2주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생각보다 짧다고 생각했다. 고전적인 작품을 보면 눈동자 하나 그려 넣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단 2주 만에 그려낸 ‘첨벙’,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가 뒤로 물러나게도 했던 그 ‘첨벙’을 2주 만에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전시장 한편에 걸려있던 날씨 시리즈 중 하나인 <비>와 <수영장으로 쏟아지는 물, 1964> 등의 습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크니 작품 세계를 딛고 있는 다리뼈와 같은 주제, 물. 자신을 사뭇 다르게 했던 물을 표현하고자 수없이 보낸 많은 ‘시간’은 모두가 주목하는 <bigger splash>에는 쓰여 있지 않은 증언이었다. 그가 보낸 시간을 천재성으로 단정할 수 있었을지언정. 그는 그야말로 물에 관한 한 구멍을 뚫었다. 

두 번째 테마, ‘로스앤젤레스’의 작품이 첫 번째 테마에 걸려있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은 물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이전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아크릴릭 물감의 이용도 한몫했던 것 같다. 아크릴릭 물감은 빠르게 건조되기 때문에 캔버스에 붓이 가는 것을 신중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그의 세심한 관찰력이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문장을 읽었다. 나는 J에게 ‘난 이런 게 좋더라.’ 했다. 내가 예술가에게 감탄할 때란 이런 때다. 기술을 익히길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 매일의 시간을 체화하고 경험을 내재화하기 위해 노오력하는 것. 예술을 추상화하지 않는 것. 이것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끝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과 같다. 웃음이 났다. 세계적인 화가도 빠르게 건조되는 아크릴릭 물감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고, 그에 대한 답은 화가로서 더욱 유능해지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습작은 기념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멋이 없으니까. 어긋난 선, 잘못 묻은 물감. 밋밋한 색, 부정확한 형태. 이런 것들이 멋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작고 초라해 보이는 습작 앞에 서서 둘둘 말린 거대한 시간의 뭉치를 본다. 그것은 무서운 것이다. 멈추지 않는 물결에 빼곡히 적힌 일기 같은 것이다.

J와 나는 앞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작품들 한가운데 섰다. 그리곤 ‘이거 마치 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인데.’라는J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니는 전 생애에 걸쳐 변화했고, 계속해서 변화해 갈 것이다. 그리고 변화란 실험하여 그 경험을 내재화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이 있지 않을까. 


연습은 멋이 없다. 그러나 무섭다. 연습은 가진 게 없는데 배신할 수 있고, 미약한데 무엇이든 휘두를 수 있다. 내 메모장에는 [매일 오늘]이라는 폴더가 있다. [매일 오늘]에는 매일 오늘 내가 본 것, 떠올린 것, 마음을 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술가가 아닌 나에게는 일종의 연습이다. (기억력이 나쁜 것은 비밀) 연습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 용감한 것은 안 비밀.


어쨌거나. 오늘의 [매일 오늘]은 이런 말들이 몇 자 적힐 것이다. 

일도 사람도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하리라. 오늘 받은 영감으로 내게는 무엇이 연습이고 무엇이 실전일까. 이런 생각으로 앞으로의 한 달을 지내보리라.

‘오늘만 날인가’ 했지만 오늘은 ‘날’이었다. 아주 그럴듯한 날. 



제가 좋아했던 <비>는 기념품 가게 어디에도 없었지만, <수영장으로 쏟아지는 물>은 노트로도, 소형 액자로도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런대로 만족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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