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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Nov 07. 2019

[월간 안전가옥] 9월

요즘 부쩍 네 생각이 나는데 말이지. 

비 오던 날 저녁,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봤던 그 날. 그 날이 자꾸 떠올라. 주인공인 에바(틸다 스윈튼)는 파리한 얼굴을 하고는 아웃 포커스 된 케빈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 포스터. 그 극장 앞에 아주 오래 걸려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틸다 스윈튼의 눈을 한참 들여다봤었지. 


영화를 다 본 후 너는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어렵게 말했어.

“너는 저게 재밌어? 왜 나한테 저런 영화를 보여줬어?”


뭐라고 했더라. 어서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던가. 당황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어. 얼른 네 기분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러다 곧 너는 이해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말을 이어갔어. 


“그러니까 애가 나쁜 거지? 엄마가 나쁜 건가?”


나의 재미와 너의 재미가 같은 거라곤 단어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막막했어. 어서 치킨이 먹고 싶었지. 우리 모두에게 치킨은 ‘답’이잖아. 재밌는 건 사람 머릿수만큼 다양한 답이 존재해도 맛있는 건 오해가 거의 없잖아. 더구나 치킨인데.


네 재미를 오해하고 싶지 않았고, 내 재미도 함부로 침범받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웠어. 그땐 많은 게 어설펐으니까.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책 속에는 이런 말이 있어.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난 평론가도 아닌 데다 영화에 대한 ‘엄숙 주의’ 그런 거 참 쓸데없다고도 생각해. 재밌는 걸 재밌다고, 재미없는 걸 재미없다고 하는 게 뭐 나쁜가? 하지만 재밌다는 말에 다 담기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데 하물며 재미없다고 절사 당하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아쉬워? 

재미라는 것. 그리고 좋은 서사라는 것. 그게 사람 머릿수만큼 다양한 답을 가졌다면 다수로부터 사랑받는 이야기는 왜 사랑받겠으며 외면받는 이야기는 또 왜 그럴까.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나’와 <이방인>의 ‘뫼르소’ 등을 소시오패스라 규정한다고 해서 그 소설의 비밀이 풀리지는 않는다. 좋은 서사란 대체로 그런 식의 거친 규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발파 장치다. 케빈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이야기는 ‘낳고 보니 아들이 소시오패스인’ 한 불행한 엄마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뿐이다. 


‘애가 나쁘단 거야, 엄마가 나쁘단 거야?’

네가 의문을 가졌던 그 지점. 그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몰라. 어느 한쪽 편에 치우친 이야기가 아니라 보는 이를 계속해서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결국 남아 있는 감정이 공포나 연민이 아닌 불완전한 언어 바깥에 머무는 것. 나는 그런 서사가 좋은 서사라고 생각해. 단번에 답을 내릴 수 없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해. 독자가 아니라 시장 흐름에 촉을 두고 서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 그런 관점을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 어느 정도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 뭐 그런 거. 


잘 지내니? 

지금 생각해도 난 그 영화 재밌었는데. 넌 여전히 아닐까?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 자주 만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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