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모리 Nov 07. 2019

[월간 안전가옥] 10월

#일

집요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사실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집요함을 목격할 때라든가 집요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뇌의 어느 부분이 제대로 활성화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독 ‘집요함’이라는 특성에 반응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누구나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기억하게 되는 어떤 것. 나를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가치 혹은 명제 같은 것. 


이번에는 최근에 접한 두 가지의 집요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사실 두 가지의 집요함은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냥 이유 없이 좋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한다. 보고 나면 굉장한 무기력이 찾아와서 자주 보긴 힘든 작품이지만,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도 특히 <밀양>을 좋아한다. 남다른 집요함 때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집요함에 대한 반응은 대개 이렇다. 집요함은 수월하게 이해받기 어렵다. 남들이 쉬이 수긍하는 집요함을 집요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지난주 <방구석 1열>에는 <밀양>의 주인공인 전도연 배우가 게스트로 출현했다. 사실 저 말은 전도연 배우가 <밀양>을 촬영하면서도 여러 번 했던 말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첫 씬, 신애의 차가 길가에 퍼진 바람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는 장면을 스물여덟 테이크나 찍었다고 하니, 나라도 저 말을 안 했으리라고는 장담 못 하겠다. 지나가는 차도 멈추는 타이밍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연출자만이 할 수 있는 생각 이리라. 물론 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도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장담 못 할 일이지만. 


연출에서의 집요함, 신애의 자기 파괴적인 집요함, 내 눈마저 퉁퉁 부을 것처럼 슬픔이라는 감정의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집요함 등 <밀양>이라는 영화를 여러 가지의 집요함이 둘러싸고 있지만, 고정 게스트인 씨네 21의 주성철 편집장님의 멘트로 인해 나는 이 영화에 또 다른 집요함을 추가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신애는 끝까지 화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다르덴 형제의 <아들>의 결말과 비교했는데, <아들>의 결말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과 잠시간 쫓고 쫓기는 작은 소란을 벌인 후 가쁜 숨이 잦아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화면이 종료된다. <아들> 역시 직접적인 화해를 결말로 보여주진 않아도 보는 이에 따라서 화해를 암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 <밀양>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말미에 신애는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가는데, 그곳에서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딸이 신애의 머리를 잘라주게 된다. 신애는 가운을 벗어던진 채 미용실을 박차고 나와 집 마당에서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신애가 가진 슬픔과 아픔을 가해자와의 화해를 통해 해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살아야 하는 여자, 그러나 그 아픔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신애의 모습을 암시하며 끝낸 것. 불행하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결말. 주인공이 ‘화해할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채로 끝난 것. 이것은 집요함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두 번째 집요함은 최근에 읽었던 단편소설 중 하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에 수록된 <장미를 본받아>라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이다. 


응접실에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흰 칼라가 달려있는 갈색 드레스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다. 부엌으로 가서 우유를 한 잔 들고 응접실로 돌아온다. 소파에 앉아 우유 한 잔을 천천히 마신다. 테이블 위 꽃병에 꽂아둔 장미를 바라본다. 손에 들린 빈 잔을 본다. 가정부인 마리아를 부른다. 장미를 친구의 집에 전해달라고 말한다. 얇은 종이를 찾아와 장미를 꺼내 감싼다. 장미를 들어 바라본다. 가정부 손에 들린 채 멀어지는 장미를 바라본다. 등을 기대지 않고 소파에 앉는다. 남편이 열쇠 구멍을 돌리는 소리를 듣는다. 미소 짓는다. 남편에게 ‘그게 다시 왔어. 장미 때문이었어.’라고 말한다. 소파에 앉은 채로 문 가에 기대어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이것은 본문이 아니라 약 28 페이지 분량의 이 짧은 소설 안에서 화자인 라우라가 보인 행동만 모아본 것이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경증 혹은 강박증을 가진 라우라가 부부동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고, 드레스를 고른 후에 공복이 되지 않도록 때맞춰 우유를 챙겨 먹으라는 의사의 당부가 퍼뜩 떠올라 우유를 마시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장미를 초대받은 집에 선물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남편이 도착하는 내용이다. 


내가 이 짧은 이야기에서 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라우라가 보인 이 단순한 행동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채우는 사고-감정의 변화에 대한 서술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장미를 선물할까? 말까?’ 이 하나의 문장이 장장 16 페이지 분량으로 늘어난다. 어떤 충동에 의해 장미를 선물하기로 해놓고 불현듯 장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데, 그 매료되는 과정을 아주 집요하게 적어 놓아서 읽는 동안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라우라는 장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 맞나? 생각이 집요 해지다 보니 스스로 믿어버리게 된 것인가? 아니면 믿어버리고 싶어서 이토록 긴 시간 장미만을 바라보며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라우라의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라우라의 강박이 시작된 것일까? 이런 생각들. 그러다 나조차 강박이 생길 지경이 된다. 


소설은 라우라가 소파에 앉는 것에 대해 서술할 때에도 모두 다른 ‘앉는다’로 서술한다. ‘그녀는 손님처럼 자리에 앉았다.’ 또는 ‘우유를 거실로 가져가 “가장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다음’,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등을 기대지 않고. 단지 가만히 쉬는 자세로.’ 등 라우라가 생각이 달라지면서 ‘앉는 자세’의 변화도 달라지고 그 자세에 대해서도 모두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집요하게 섬세하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 치자면 한두 컷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표현할 다른 어떤 재료를 다 가져와도 이 이야기가 표현할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없을 정도로 완벽히 문학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가 그간 이미지로 그려지는 이야기에 주로 매료되어 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는데, 문학적인 집요함이 담긴 작품을 접하고 나니 아주 기분 좋은 자극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두 가지의 집요함에 상호 연관성은 없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집요함을 목격할 때마다 느슨한 정신에 긴장이 생긴다. 집요함에 대한 생각 끝에 나는 이 말일 자꾸 떠오른다. 


“고민은 끝까지 해야 돼.”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대표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다. 어디서 들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에게 ‘집요함’이란 고집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어떤 태도와 그것의 지속 기간의 조합에 따라 그것은 아집이 되기도 하고, 양질의 집요함이 되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태도를 얼마큼 지속할 것인가. 

요즘 빈칸에 들어갈 말과 숫자를 종종 고민하며 산다. 

가능한한 집요해지고 싶다.


---

한줄 : 매달 월간 안전가옥을 내면서 다음 달 쓸 것을 미리 생각하는 집요… 아닙니다. 








작가의 이전글 [월간 안전가옥] 9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