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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Jan 10. 2020

[월간 안전가옥] 11월

최대치의 공감은 이런 모습일까? | #일하는사람 #헤이든 #월간안전가옥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는 것 같다.’ 최근 제가 저의 SNS에 남긴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정신줄을 꽉 붙잡지 않으면 아래와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미숙아.”


김지영은 엄마의 이름을 부릅니다. 엄마의 엄마가 되어 엄마의 이름을 불러요. 그런 김지영을 두고 김지영의 엄마는 옥 같은 내 새끼, 금 같은 내 새끼 하며 그를 쓰다듬습니다. 김지영은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편의 전 애인이 되었다가, 자신의 외할머니가 되었다가, 자신의 엄마가 되었다가. 그 인물이 되어 그들의 말을 대신합니다. 그의 남편은 김지영의 증상을 두고 ‘빙의’라고 검색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 검색해보니, 나무위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빙의]
사람의 몸에 타인의 영혼 또는 악령이 들어가는 현상. 쉽게 말해 귀신이 들리는 것. 빙의하면 평소와는 다른 인격이 표변하게 되며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또 다른 자아인 다중 성격적인 다른 인격이 표출되는 것이라고도 말을 한다.


김지영이 자꾸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 속수무책의 순간. 다른 사람이 되기 바로 직전에 텅 비어 있는 김지영. 그 빈구석을 다른 사람으로 채우는 김지영. 이것은 그의 초과한 공감의 상태를, 마음의 흡수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 김지영. 김지영 아닌 김지영은 저에게 마치 일종의 대명사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구글에 ‘김지영’을 검색하면 ‘다른 사람을 완벽히 흡수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이는 상태 혹은 사람’이라고 나올 것처럼요.


이런 김지영을 두고 ‘빙의’라고 검색한 것은 잘못이에요. 김지영이 보인 증상은 측은지심과 역지사지를 뛰어넘어 타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니까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겪으며 살아온’ 김지영의 존재가 말도 안 되는 일을 보고 겪어왔던 또 다른 여성의 존재와 뒤섞이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할머니가 겪은 것과 엄마가 겪은 것 그리고 김지영이 겪은 것들이 뒤섞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일들이 섞일 수 있을 만큼 ‘여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두 유명인의 죽음을 목도하고서 이 생각은 조금 더 또렷해졌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너무 이상한 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본 후 덜컥 겁이 났고, 이내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 활은 또다시 어느 곳을 향해 당겨질까, 비슷한 절망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일은 또 어떤 강도로 주먹을 휘두를까. 뭐 이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물론 두 사람의 죽음은 개별의 상처와 아픔에서 기인한 것이지, 베르테르 효과니 하는 글루미 선데이 뺨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어느 영화 평론가의 영화 해석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 역시 여러 가지의 이유로 복잡한 문제에 얽혀 있었고, 끝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는 그의 첫 작품이자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말입니다.


“어떤 문제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납니다. 자신을 지우는 것. 그럼 모두 끝나니까.”


저는 이 말이 사무쳤습니다. 모르겠어요. 전 앞서 말한 두 사람이. 아니 이 젊은 감독까지 세 사람이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지영이 떠올랐습니다. 자꾸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김지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기 직전의 김지영을요. 그의 내면에서 공감의 태엽이 조금씩 감겨 나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감기고 감기다가 더는 감길 곳이 없는 내면의 태엽이 결국 어긋나는 장면. 모두 가슴에 저마다 다른 양의 태엽을 감고 있는 사람들. 우리 마음에는 과연 얼마큼의 여유가 남은 걸까요. 두 유명인의 죽음은 내 태엽을 얼마나 감아 놓았을까요. 


그리고 얼마 후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앞서 말한 ‘최대치의 공감’으로 인해 이제 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 미스테리아 19호에 실린 김보현 작가의 단편 소설 <블러디 마더>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개 방식이 독특해서 구조를 뜯어보느라 두어 번 읽었던 단편이에요. 이 이야기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읽는 재미가 많이 떨어질 것 같아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딸을 잃은 엄마가 뱀파이어로 환생하는 이야기입니다.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축약한 것을 용서하시길)


처음에는 <블러디 마더>를 비현실적 설정으로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오해했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여성 역시 공감의 극한까지 가서 결국은 조금 다른 존재가 된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항간에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말이 안 된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겪느냐고, 소설이라고 억지를 부린다고도 했지요. 세계 전역으로 번역되어 세상의 거의 모든 여성에게 현실성 있고 공감 가는 이야기가 된 후에 그 말을 했던 분들은… 음… 다들 어디 가셨나 봐요. (음?)


말이 되는 이야기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구별하는 것. 이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김지영이 겪는 일들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겐 ‘빙의’라는 설정이, 누군가에겐 차별의 빈도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이것이 유일하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김지영이 종종 다른 여성이 되어 그의 말을 대신한다.’ 저는 이 소설 속 김지영의 상태가 가장 말이 된다고 믿습니다. 김지영이 겪는 모든 일은 현실적이지만 모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건 절망적인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읽는 저의 믿음의 위치를 직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믿음이 수정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블러디 마더> 속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여자. 그녀는 말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과 말보다 오래 살아남아 그/녀의 고요한 밤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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