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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o Jul 18. 2024

해바라기 씨



그날 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계속해서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 그 집은 어슷하게 켜진 오렌지 조명 아래로 나무로 된 외벽과 서재 그리고 붉은색의 카펫이 은은하게 빛을 받아 고풍스러웠다. 이 집에는 떡갈나무로 된 서재가 있었다. 거기에 미학사의 보배 같은 지식을 담은 책들이 못해도 천권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서재의 칸마다 정성스럽게 나무로 짜인 액자 틀 속 아리스의 어렸을 적 사진들이 끼워져 멋스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재의 아래칸에는 양주 몇 병도 있었다. 앞 쪽에는 럼이나 진이, 뒤쪽에는 아마 그리스산 좋은 위스키가 있었다. 그의 식탁 위에 어질러진 식기 중 섬세한 손길이 가지 않은 것이 어느 것 하나 없었고 집의 공간을 메우는 사물 중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구나 이 진심을 역사로 바꿔 부를만했다. 그곳에 역사가 아닌 것은 나의 역사뿐이었다. 내 안경은 그날 유독 더러웠다. 서재 칸에는 마트료시카도 놓여 있었다. 그건 한 쌍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읽을 수 없는 그리스 서적들 앞에 붉고 아름다운 러시아 인형은 잘 어울렸다. 나는 계속 해바라기 씨를 까먹었다. 그는 오고 가며 하나씩 먹기 위해, 아침에 내린 커피 한 잔과 함께 먹으며 입맛을 돋우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다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실 때 소안주 거리로 하기 위해, 해바라기 씨를 마트에서 눈에 보이면 사다 먹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평생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절하고 신사적이고 합리적이고 뭇 여자들이 들으면 설레게 할 말들로 그는 나를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게걸스럽게 계속해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었다. 정말 게걸스럽게 먹었다. 나는 하나를 까고 나서 간신히 알맹이를 입 안에 넣으면 동시에 다른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 이로 물어 껍질을 깠다. 이건 이곳에서 위배된 행동이었다. 밤은 깊었고 그는 자야 할 시간에 자고 있으니 멋들어지게 다음 날 아침을 맞았을 때야 곳곳에 떨어진 흔적들을 통해 내가 얼마나 간악한 범죄를 은밀한 밤에 저질렀는지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어제 배고팠어? 아니면 해바라기 씨를 좋아하니? 혹시 집에 가는 길에 먹게 조금 싸줄까?"라고 물으며 게걸스럽다는 표현을 그의 집에서 추방시켰다. 이것들을 모두 나는 참을 수 없어서 깊은 허기를 해바라기 씨로 달랬다. 그러면서 그녀가 그를 보게 되면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그녀를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둘이 시끌벅적한 바의 구석에 걸터앉는 의자와 높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맥주잔을 사이에 놓고 가깝게 이야기하는 걸 생각했다. 그 바는 아이리쉬 계열의 장식들과 짙은 갈색 벽, 약간은 붉은 조명들을 너무 어둡지 않게 밝혀놓은 바였다. 그녀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열심히 얘기할 때 그는 크게 끼어들지 않고 신중하게 대답만을 하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그가 지루해하지 않는지 반응을 살필 때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허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높은 의자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반응에 만족하며 지그시 그녀를 바라본다. 초승달처럼 휘어버린 눈자위 속 그를 향하고 있는 눈동자. 그 순간이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해 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를 보면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수북이 쌓인 해바라기 씨의 껍질들 옆에서 여전히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그녀가 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될 걸 유감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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