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ssboard Jul 14. 2024

발이 꼬여도 탱고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 (주)대원동화 <건전비디오 광고> 中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9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이 비디오 대여점의 인기는 가히 최고조로, 최신영화가 입고된 날에는 해당 영화의 포스터가 가게 출입문 전체를 장식하고, 진열장 속 거꾸로 뒤집힌 비디오 케이스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주인아저씨표 ‘회원님을 위한 추천 콘텐츠’를 요청하거나 예약금을 걸어둔 채 가게를 나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우리 집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비디오를 빌려 보곤 했지만 2000년대 들어 가정용 컴퓨터가 대부분의 집에 보급되고부터는 주로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되면서 점차 비디오를 빌려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90년대에 개봉된 영화들은 내게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지금 그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느끼곤 하는 일종의 보물 상자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도 문득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por una cabeza'를 듣고 오랜만에 ‘여인의 향기’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는데, 기억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영화 속에서 나는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영화 속 찰리와 비슷한 나이 또래에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그저 신경질적이고 정신이 불안한 아저씨로만 느껴지던 프랭크가 약 20년이 지난 지금, 표정과 숨소리 심지어 짧은 침묵에조차 그에게 설득되어 버릴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온 것이다.    

출처 : https://blog.naver.com/daraksil_hyejin/222273669941

알 파치노가 열연한 프랭크는 퇴역군인으로, 세련된 언변과 사교적 교양을 갖추었지만 군대 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해버린 인물이다.

그는 현실을 비관하며 스스로 삶을 끝내기 위해 노인 돌봄 아르바이트를 모집한 뒤 가족에게조차 비밀에 부치고 아르바이트생 찰리와 함께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다.


프랭크는 레스토랑에서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이 쓰고 처음 본 여인과 정열적인 탱고를 추며, 페라리로 도심 속을 질주하면서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이내 호텔로 돌아와 찰리 몰래 미리 계획해 두었던 권총자살을 시도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찰리가  예정보다 일찍 호텔로 돌아와 극도로 흥분한 프랭크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만류하며 지금의 삶에 적응하라고 설득하는 찰리에게 프랭크는 절규하며 묻는다.


“무슨 삶? 나에겐 삶이 없어. 난 지금 어둠 속에 있단 말이다, 알아들어? 난 어둠 속에 있다고!”

출처 : https://blog.aladin.co.kr/783893168/9313642

권총을 소년의 머리에 겨누며 흥분하는 프랭크에게 찰리가 자포자기하며 그럼 방아쇠를 당기라고 소리치지만, 프랭크는 부여잡은 옷깃 아래에서 오르내리는 소년의 불안정한 호흡을 느끼곤 묻는다. 

“너 죽고 싶지 않지?”       


그리고 찰리 역시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그 목적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파괴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선 볼 수 없는 망설임을 프랭크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읽어낸다.

“중령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프랭크는 고개를 끄덕인다.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만 대봐.” 

프랭크는 자신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었는지 묻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건 질문이 아닌 부탁, 애원이었을지도.


“두 개를 대죠, 중령님은 제가 본 다른 누구보다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몰아요.” 

짧은 정적. 서툴고 풋내 나는, 그야말로 고등학생다운 어리숙한 대답에 프랭크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는다. 그거면 충분하다. 거창한 이유 따위 없더라도 그는 다만 살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팽팽하던 끈이 느슨해지듯 프랭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둘 다 잘하는 사람 다시는 못 볼 거다.” 


다시 삶을 향해 돌아선 프랭크지만 그의 눈앞엔 여전히 양 갈래 길은커녕 빛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니, 찰리?”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이미 프랭크가 답을 가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여인의 향기. 그것은 분명 삶을 향한 갈망이었으리라. 찰리는 그 사실을 프랭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발이 꼬여도 계속 탱고를 춰야죠.”


출처 : https://steemit.com/kr/@oakenshield/4yx9ly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탱고 씬을 꼽곤 한다. 탱고를 처음 춰보는 여성을 부드럽게 리드하며 춤을 추는 프랭크는 마치 ‘갓 태어난 별’처럼 우아하고 화려하게 타오르지만, 초신성(超新星)이 실은 별의 죽음의 징조라는 아이러니와 같이 그의 춤은 강렬하면서도 동시에 마치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애절한 손짓과도 같은 처연함이 묻어있다.


하지만 영화를 모두 보고 난 후에 다시 한번 그 탱고씬을 보게 된다면 아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남은 정열을 모두 태우며 피어오르는 불꽃이 아닌 시련을 견디고 피어나는 의연한 장미꽃처럼 생명력을 되찾은 프랭크의 웃음에 어느새 영화 속 찰리처럼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출처 : https://blog.naver.com/hijazzz/222870746043


작가의 이전글 대중목욕탕, 찜질방, 사우나 그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