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15
직장인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한 지 어언 10년이 되어간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지만 극단 일에 관여한 적은 없고 공연할 때 배우와 스탭으로만 참여했다. 게다가 4~5년은 회사일이 바쁘고 코로나 등의 이유로 극단에 발걸음을 하지 못한 적도 있다. 극단의 회계를 담당하는 단원은 어느 날 우스갯소리로 나를 '우수 단원'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활동을 하지 않아도 월회비를 연납까지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회계 담당으로서는 극단 연습실 월세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금 등 고정비용이 나가야 하므로 예측 가능한 수입이 뒷받침되면 운영하기에 편리할 것이다. 활동하지 못할 경우는 휴단원으로 전환해 회비를 절약할 수 있는데 입단한 이래 한 번도 휴단한 적 없다. 회계 담당은 그렇게 '우수단원'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하며 극단활동 안 하고 돈만 내는 거 아깝지 않냐고 얼른 배우로 활동하라고 독려했다.
나는 회비를 연납하면 할인해 주기 때문에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 연초에 한꺼번에 낸다. 매년 극단 활동을 쉬려고 생각한 적은 없으므로 흔쾌히, 별 고민 없이 회비를 낸다. 그러다 회사일이 바빠서 연습할 시간을 내기 어려워 참여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없어서 안 하는 등 몇 번 공연에 참여하지 않으면 또 한 해가 훌쩍 흘러가고는 했다. 기실 모든 건 목표의식을 갖고 도전해야 뭐라도 하게 된다. 아무리 취미라 해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작품을 고르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연습하면 되는데, 적극적으로 덤비기보다 어떤 작품을 공연할 건지 지켜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뭔지 살피다 손을 들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올해는 극단 운영진으로 활동해 보자는 권유를 받고 나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하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 극단의 큰 행사인 20주년 기념 공연 기획을 맡았다. 4월부터 기획한 공연이 드디어 이번 주말에 무대에 오른다. 오늘은 극장에 무대를 셋업 하는 날이다. 무대 셋업은 한마디로 육체 노동하는 날이다. 그래서 함께 짐을 나르고 힘쓸 단원을 모집하고 용달차를 섭외해야 한다. 무대 셋업은 연습실에서 무대 도구, 소품, 의상, 분장도구, 공구 등을 확인하고 극장까지 옮기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번 공연은 극장에 배우들의 등, 퇴장 동선이 이미 만들어져 있어 가벽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큰 짐 중의 하나가 가벽인데 그것을 제외하니 짐이 아주 간소해 보인다. 지난 8월 말에 무대 도구를 만들고 페인트 칠을 하며 극장으로 옮길 때는 한번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야 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원래 모양 그대로 밖으로 빼내져 있었다. 어제 배우들이 연습 후 요리조리 궁리하며 지하에서 지상으로 잘 옮긴 것이다. 지난 "무대제작 아카데미"때 강사가 가벽 설치하는 걸 가르쳐주면서 연습실 계단을 어떻게 빠져나가고 소극장에는 어떻게 넣을지, 안 들어갈 것 같아 걱정되겠지만, 각도를 잘 맞추면 계단으로 충분히 다 옮길 수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거의 모든 극장 무대에 맞는 가벽 크기가 있다면서 그 사이즈에 맞게 제작하면 문제없다고 했다. 극장과 연습실은 대부분 지하에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계단으로 모든 걸 일일이 옮겨야 한다.
이번 공연에 가벽은 없지만 거의 천정에 닿을 무대도구가 2개가 있는데 연습실을 무사히 빠져나와 용달차에 딱 맞게 싣고 극장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각도를 비틀며 옮겼더니 다 들어갔다. 그냥 한 눈으로 볼 때는 절대 들어갈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강사의 말 그대로다. 짐이 별로 없어 옮기는 건 금방 했다. 일할 단원이 많이 오기도 했다. 일사불란하게 분장실에 둬야 할 물건, 무대에 놓아야 할 물건, 매표소에 두어야 할 물건 등을 구분해 놓는 건 바로 끝났지만 시작은 이제부터다. 조명기를 달고 무대에 조명이 떨어지는 위치와 밝기 등을 확인해야 한다. 소극장은 대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조명기를 다는데 이 극장은 층고가 높아 조명기를 다는 바텐(batten)을 내리고 올릴 수 있는 곳이다. 덕분에 위험하게 사다리를 타지 않아도 되었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필요한 위치에 조명기를 달 수 있어 속도가 빨랐다. 다만, 무대 뒤쪽은 바텐이 고장 났다고 하여 양 벽에 고정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작업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베테랑 1기 선배들을 비롯한 윗 기수 선배가 출동하여 도와줬다. (20주년 답게 1기부터 20기까지 참여하는 공연이 되었다.)
조명 작업은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다. 그 사이 나는 극장에서 안내한 극장 사용법을 숙지한 후 마트에 가서 휴지, 손 세정제를 사다 화장실에 비치했다. 사용하는 동안 쓰레기 처리를 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화장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청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좀 암담한 마음이 들었다. 기본 청소는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면 아무래도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공연 당일 관람객들이 가능한 깨끗하게 사용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기획은 한 마디로 잡무를 담당한다. 특히 극장에 들어오면 배우와 스탭 영역 밖의 일은 모두 기획의 일이다. 오늘도 빔 프로젝터 리모컨의 건전지를 사러 다니고 무대 셋업한 사람들의 점심 식당을 알아봤다. 조명 오퍼실에 라이트가 필요하다고 하여 해결하고, 작업하는 단원들과 연습할 배우들을 위한 생수를 샀다. 뭔가 필요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일단 기획에게 물어보기 때문에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 물론 혼자 해결하는 건 아니다. 기획팀이 있으니까 서로 의논하고 돕는다.
아침 9시부터 움직였는데 저녁 5시쯤 끝났다. 대학로를 왔다 갔다 하며 걸었을 뿐인데 만 보 넘게 걸었다. 평소 출, 퇴근으로만 5천 보를 걷는다. 외근을 하면 8천 보 정도인데 만 보를 걸어 괜히 뿌듯하다. 그렇게 오래 많이 걸은 것 같지 않은데 기분 좋다. 햇빛 짱짱한 날이라 땀으로 범벅된 하루였다.
무대에서 실전처럼 연습한 후 공연 날 관객을 맞이한다. 20주년이라고 욕심내어 역대급 큰 극장을 대관했다. 좌석 수가 무려 150석이다. 우리 극단으로서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 극장을 빌린 적 없다. 불현듯 객석을 어떻게 채울지 걱정이 밀려온다. 4회 공연이므로 600석이고 목표는 300석이었다. 그러나 지금 네이버의 예매 현황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이버로 유료관객을 받는 것도 처음이다. 예산이 없어 광고를 못하고, 홍보담당이 무료로 알릴 수 있는 곳에 열심히 올려놨지만 단원들의 지인이 아닌 일반 관객이 과연 몇 명이나 올 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할 따름이다. 무대제작, 의상, 분장, 사진 및 영상 촬영, 포스터와 리플릿 제작 등 모두 단원들이 한다. 직장 다니며 시간을 쪼개어 준비한다. 재능기부를 하며 좋아하는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번 땀과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