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배우는 시간 (2)
두 번째 강의까지 들었지만 글이 잘 써지지는 않는다. 글쓰기 숙제를 한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딴짓하는 시간이 많다. 클래스 강사인 교수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화면에서 활짝 웃고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13권이나 되는 이가 하는 말이니까 일단 믿기로 하자. 어제 글쓰기 클래스에서 한 말들 말이다.
주로 이런 내용들이었다. ‘글 쓰는 사람은 일단은 형식을 갖춰서 써야 한다. 문단의 첫 문장은 들여 써야 한다. 문단이 바뀔 때만 줄바꿈을 해야 한다. 문단의 분량은 비슷한 것이 좋다. 문장은 지나치게 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맞춤법이 틀리면 글의 전체 신뢰성이 깨지므로 틀리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런 형식은 일종의 약속이고 독자들이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형식을 지켜서 쓰지 않으면 읽어보기조차 싫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매년 같은 말을 얼마나 반복해서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강의 내내 ‘형식’이라는 단어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오늘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존재감이 큰 단어였으므로 ‘형식 씨’라고 사람처럼 표현을 해서 노트에 메모를 했다. 빨간색으로 별표도 치고.
어제 수강생들이 숙제로 제출한 글 모두 교수님의 지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설리 님은 문단 단위로 글을 쓰지 않았고 유리 님은 문단 내부에서도 줄바꿈이 되어 있었다. 로그 님의 글은 문단 구분을 줄바꿈으로 하지 않고 한 줄 띄우기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과제글을 읽을 때 독자로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 문장만 쓰고 바로 줄바꿈이 된 설리 님의 글에서는 마음속에 많은 말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40이 훌쩍 넘으니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아진다.
그중 미래의 나의 모습에 대해 그렇다.
10년 후의 나의 모습은?
20년 후의 나의 모습은?
-설리 님의 글쓰기 숙제 중에서-
속에 두고 내뱉지 않는 한 문단만큼의 말이 줄바꿈 여백 속에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공백이 불편하다기보다는 그 공백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공백 속에 있을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느라 한참 머물러 있었다. 내 상상이 설리 님의 마음을 맞혔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글을 읽다 멈추어보는 일도 내게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로그 님의 글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로그 님은 문단을 바꿀 때 줄바꿈 방식으로 하지 않으시고 한 줄을 아예 띄우는 방식으로 하셨다. 인터넷 글쓰기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란다. 로그 님은 블로거라고 하니 금방 이해되었다. 하지만 종이에 출력해 놓고 읽을 때에도 나는 로그 님이 사용하신 방식이 더 눈이 편했다.
또 맞춤법은 어떠한가. 맞춤법을 잘 지켜서 글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교수는 ‘굳이’를 ‘구지’라고 쓰는 사례를 들었다. 그때 교수의 표정에서 염증(?) 비슷한 감정을 읽었다. 글쓰기 선생으로 많은 과제글을 읽으면서 그런 오류를 수천만 번쯤 접했던 것 같은 표정. 교수의 염증이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되지 않았다. 최근에 나는 독서량이 많지 않아 보이는 25살의 청년이 쓴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책이 마음에 드니까 2쇄 찍을 때는 고쳐서 찍으라고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낼 요량으로 틀린 곳을 모두 메모해 두었다. 책을 절반 정도 읽었는데 지금까지 찾아낸 맞춤법 오류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그래도 나는 그 책이 마음에 든다.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지 고민 많은 이십 대의 생생한 목소리가 잘 담겨 있다. 이 청년의 다음 책도 읽고 싶다.
세상이 말하는 소위 학식이라는 것을 별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기성 작가들의 글보다 글쓰기 형식을 전혀 배운 것 같지 않은 어린이들의 글이나 인터넷 댓글에 감탄할 때가 많다. 세상의 문법대로 살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나는 글이 좋다. 그런 글들은 날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너무나 단정해서 무료함에 빠뜨릴 위험. 트집 잡을 것은 없지만 딱히 매력도 찾을 수 없는 독서의 위험.
그러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형식을 잘 지키라고? 혹시 공부를 많이 한 분들만 공유하는 세계에서의 문법인 것은 아닐까? 글쓰기 세계에서는 그분들이 주로 심사위원이니까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려면 그 틀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주에 글쓰기 숙제를 하느라 갑자기 품게 된 꿈 ㅡ 글쓰기 공모전에 출품해서 상금으로 200만 원을 타서 남편에게 선물하고 싶은 나ㅡ 을 위해서는 심사위원의 문법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심사위원들은 제한된 시간에 산더미 같은 글들을 읽느라고 퍽 피곤하겠지? 그 세계에서는 놀라운 발상과 통찰이 담긴 글일지라도 형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사 단계에서 읽히지도 않고 제쳐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나를 통째로 삼킬 무렵 성공 경험 하나를 떠올린다. 지난주에 교수의 말을 적용해서 글쓰기 숙제를 해낸 경험 말이다. 처음에는 A4 2장 분량의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수필은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고쳐 먹는 내용의 글이라는 교수의 강의 내용을 적용하니 신기하게 글이 써지더란 말이다. 분량으로만 치자면 수강생들 중에서 내가 1등이었다. 이번에도 책을 13권이나 쓰신 우리 교수님을 한번 믿어보자. 교수님이 해 주신 말씀대로 형식을 잘 지켜보자.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내 행동이 품은 모순에 웃음도 나온다. 독서할 때 틀린 맞춤법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면서 나는 왜 출판사에 오류 정정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려고 한단 말인가. 또 나는 어제 합평 시간에 로그 님의 글 중에서 마지막 문단이 아름다워 아주 여러 번 읽었는데, 다음 문장에서 자꾸 덜커덩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거든 항상 그리움에 목이 메인다.
-로그 님의 글쓰기 숙제 중에서-
아마도 ‘-이거든’이라는 표현이 ‘-이든’이라는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느라 그런 것 같다. 글을 읽다 멈추고 생각해 보는 일은 재미있지만 힌트가 너무 없을 때는 금방 흥미를 잃기도 한다. 설리 님의 글도 공백이 채워져 있었다면 나는 글과 더 풍부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도 같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지금 아주 훌륭한 독자라는 것. 애정을 담아 꼼꼼하게 읽고 있다는 것. 왜 나는 이 글들을 정성스럽게 읽고 있냔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반론으로 제시한 모든 사례에서 나는 글쓴이를 알고 있다. 설리 님, 유리 님, 로그 님은 자기소개 시간부터 인상이 좋았던 글쓰기 클래스 급우들이고 25살 청년은 내가 좋아하는 분의 아드님이다. 글 바깥에서 이미 신뢰가 확보된 상태였고 글을 읽기 전부터 호기심으로 무릎이 당겨진 상태였다.
아~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비로소 냉엄한 글쓰기 세상이 보인다. 글쓰기 세상에서 애정을 담뿍 가진 채로 읽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물다. 대부분은 제 살기 바쁜 독자를 글로만 만나야 한다. 오직 글로만 신뢰감을 얻어야 한다. 결혼식에 축하객으로 갈 때는 아무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것일지라도 ‘추리닝’이나 수영복을 입고 가지 않듯이 상황에 맞는 글쓰기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일단은 상황에 맞는 형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맞겠다. 내가 이 공동체의 일반적인 상식 밖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오, 하는 안심을 시켜야 하므로.
형식 씨와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좋은 글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첫 단추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썼어요. 사실은… 당신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어요.’하는 정성스럽고 따뜻한 말. 형식 씨가 그 역할을 해 준다면 기꺼이 기꺼이 그와 친하게 지낼 수밖에. 글을 다 쓰고 나면 맞춤법 검사기에 넣고 한 바퀴 돌려 보자.
From 51세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