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를 떠나 혼자 서울 강서구에 살게 되면서 김포공항과 가까워진 건 여러모로 좋았다. 좋아하는 제주로 떠날 때도, 공항이 있는 지역 도시로 향할 때도 편리했지만 공항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는 부쩍 김포공항을 좋아하게 됐다. 분주히 이동하는 사람들 틈을 뚫고 승강장으로 나가면 회사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오갔다. 버스 안에는 여행객도 있었고 기내에서 근무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도 파견회사에 소속되어 하루에도 수차례 기내에 들어갔다. 편마다 10분이란 짧은 시간뿐이어도 비행기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설렘을 느꼈다.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이 하는 일은 기내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이제 막 착륙해 승객이 내리고 다음 승객을 맞이하기 전, 우리는 재빠르게 기내에 올랐다. 첫 좌석부터 마지막 좌석까지 쉴 틈 없이 움직여 안전벨트를 매뉴얼대로 정리하고, 앞좌석에 비치되어 있는 책자를 또 순서대로 정리했다. 오염이 있으면 시트를 갈아 끼우기도 했다. 좁은 좌석 틈에 서서 잽싸게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었기에 동료는 일곱 명 전부 여자였다. 배낭처럼 메는 청소기는 제법 무거워 보였고 그 때문인지 남자 한 명이 도맡아 했다. 좁은 기내 화장실을 청소하고, 비행기마다 개폐구가 달라 저마다의 방식을 익히기까지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내가 입사한 계절은 여름으로 무더위와 폭우가 번갈아서 계속됐다. 유니폼은 두꺼웠고 우리를 태워 다음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는 차량이 늦으면 그늘 한 점 없는 활주로를 뛰어다녔다. 휴게실에는 에어컨과 정수기가 있고 간간이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제공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여름 날씨의 변덕을 이겨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늘 더위에 지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언제든 착륙하는 비행기 스케쥴에 따라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전까지 나는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로 불같이 화풀이를 하는 사람에 지쳐 있었다. 공항에서는 일을 가르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를 신경 쓰는 사람 없이 일할 수 있다는 점, 스케쥴 근무에서 오는 여러 수당이 마음을 끌었다. 2주 가까이 이론과 실전 교육을 거듭하며 현장에 투입됐다. 한 조 인원을 태운 차량이 본사에서 출입구까지 운행됐고, 직원 출입구에서도 철저한 수색 후 공항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출입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매번 신분증을 맡기고 검색대를 지나야 했다.
그렇게 공항 안으로 들어가면 물품과 우리를 실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용도에 맞게 좌석이 가로로 길게 개조돼 있었다. 이제 막 청소와 정리를 마치고 내려오면 대부분은 아이보리색 그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냉방시설이 부족하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도 성난 여름 날씨가 얼마나 매서웠는지 모른다. 좌석마다 갈거나 채워야 할 물품을 잔뜩 들고 간이계단을 오르내렸다. 때로 거센 비가 오면 뒤집어쓴 우비를 시트가 젖지 않게 벗어두고 좁은 좌석으로 파고들어 바로 작업에 임했다.
드물지만 운행 스케쥴이 늦춰지거나 취소되는 때도 있었다. 그러면 조금 일찍 퇴근하거나 상황에 맞춰 휴게실에서 무기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 시간은 언제나 찰나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영원처럼 느껴졌다. 멈춰버린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나는 왠지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다. 탁 트인 활주로에서는 방해물 없이 뜨고 지는 해와 기온을 느꼈다. 그 속에 있는 익명의 사람들은 한 철 피고 지는 들꽃 같았다. 실제로 김포공항 활주로에는 들꽃밭이 있기도 한데 지는 해를 받아 주황빛으로 물든 들꽃은 작지만 강해 보였다.
어느 날은 석양빛을 받아 훤히 드러난 익명들의 정수리를 보다가 지나갈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머지않아 나는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일을 그만두게 될 거고 사소한 농을 주고받으며 웃던 이들에게 한마디 인사 없이 다른 인생을 향해 걸어가게 되겠다는 예감이었다. 그들을 관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부끄럽고 슬픈 감정이 들었다.
사실 나는 수차례 공항을 이용하면서도 기내를 청소하는 이들, 십분 간 흐트러진 기내를 다듬는 익명의 손길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익명들’은 삽시간에 할 일을 마친 다음 보이지 않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활주로를 지나다니는 차량을 봐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내 탓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는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창피해 승객들이 내릴 때마다 등을 돌리고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 부끄러웠던 건 한 사람의 젊음이 사그라들고 오래 지켜온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는 허망함을 내 부모도 아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근무 기간 한 달 남짓, 짧지만 일하기 가장 가혹하다는 계절에 나는 김포공항을 스쳐 지나갔다. 오래 앓아온 공황과 우울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일어날 수 없었고 또다시 포기했다는 절망감에 울면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은 진심으로 나를 안타까워했고 다시 일어나 나오길 바랐지만 끝내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요즘 시대에는 평생직장이 없다지만 짧은 경력으로 얼룩진 내 이력서에 또 적을 수 없는 경험이 늘었다. 하지만 그해 여름 내가 되찾은 건 사람을 연민하고 아끼는 마음이었다.
긴 시간 세상을 미워했다. 이 말인즉슨 부모를 원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내 세상의 전부이니까.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를 떠나 정반대의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로 한 건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인척뿐 아니라 대학과 직장에서 당한 일은 혼자 감당하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진심 어린 사랑과 지지를 바랐을 때 가족들은 그 방법을 몰랐다. 나는 나의 아빠가 일찍 할머니, 할아버지를 잃었으며, 나의 엄마는 10대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막내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입은 상처를 감싸줄 줄 모르는 사랑 방식에 지쳐 있었다.
활주로를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불현듯 엄마 또래인 여사님들이 지친 얼굴을 들여다보고, 주름 안에 고이던 주황색 석양빛을 아름답고 슬프다고 느낀 순간이었을까. 나는 내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먹을 게 없어서 밥만 거르지 않게 돈만 열심히 벌면 그게 최선의 사랑인 줄 알았던, 평범하기 그지없고 사랑이 부족하다며 쏟아내는 딸의 분노를 지그시 받아낸 60대, 반복된 성학대 피해에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딸의 선함을 믿고 끝없이 기다린 ‘사람들’. 그게 내 부모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내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일반적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들’. 내 부모의 사랑은 먼 길을 돌아 되찾은 것이며, 한 번도 나를 떠난 적 없는 뒷배였다.
올여름 온가족이 휴가를 함께 보냈다. 두 달 전부터 언니는 제주로 가는 비행기 티켓 일곱 장을 예매해뒀다. 언니의 아이들과 형부, 부모님 그리고 내가 모두 함께 가는 자리였다. 다같이 여행을 간 건 6년만에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되도록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 명절은 물론이고 장시간 같이 있는 게 힘들어서 새벽 첫차를 타고 자취방으로 허겁지겁 돌아온 적도 있다. 실은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면서 근태관리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번 휴가에서도 빠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모든 게 괜찮지 않더라도 가족과 보낸 기억을 남기기로 했다. 언니가 잡아놓은 일정에 어렵사리 날짜를 맞췄다.
우리는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세 시에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 주차한 뒤 저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들어서니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강서구에 살 땐 멀리 도망갔다 생각했는데 자차로 이동하니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났다. 사방은 어둑했고 공중화장실엔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수화물을 부칠 시간마저 열리지 않은 새벽녘, 온가족이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아가며 서로의 졸린 얼굴을 건너다볼 때. 나는 이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