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내진설계가 가야 할 길
1971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아직 해가 뜨기 전, 고요한 새벽을 깨고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도 6.6. 규모만 놓고 보면 초대형은 아니었지만, 그 여진은 미국 건축계의 기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 중심에 있던 건물이 있었다. 당시 ‘가장 현대적인 병원’ 중 하나로 꼽히던 Sylmar Veterans Hospital. 연방 정부가 운영하고, 철근콘크리트를 활용해 튼튼히 지은 최신식 병원이, 단 12초의 지진으로 무너졌다. 그 붕괴로 49명이 목숨을 잃었다.
놀라움은 단순히 생명 피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병원은 ‘내진 설계’가 적용된 신축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 건물이니 안전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이 사건은 단일 병원 사고를 넘어, 내진 설계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쓰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는 이 비극에서 무엇을 배웠고, 오늘날 그 배움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튼튼하다던’ 병원이 붕괴했을까?
Sylmar 병원은 당시로선 드물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건설되었고, ‘내진 고려’를 포함한 설계가 적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동은 지진 발생 직후, 마치 무너져 내리듯 상부가 접히며 붕괴되었다.
첫 번째 원인은 구조의 비대칭성과 불균형이다. 건물의 외곽은 튼튼한 벽체와 견고한 기초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중심부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런 설계는 지진이라는 불균형한 하중이 발생했을 때, 에너지의 분산이 고르게 이뤄지지 않고 한쪽에 과도한 응력이 집중되면서 구조적 붕괴를 유발한다.
두 번째 문제는 구조 부재 간 연결의 경직성이었다. 구조 요소들은 강하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이로 인해 지진의 진동과 변형을 흡수하거나 분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충격이 누적되어 한순간에 깨지는 ‘취성 파괴’를 일으켰다. 이는 마치 유리가 깨지듯 예고 없이 무너지는 형태로, 당시 많은 전문가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세 번째로는 시공 품질과 감리 체계의 부재였다. 도면 상으로는 적절하게 설계된 철근 배치와 콘크리트 강도가 있었지만, 실제 시공 단계에서는 철근이 도면보다 적게 배근되었고, 콘크리트는 지역에 따라 품질이 달랐으며, 감리 과정은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처럼 완벽한 설계도 시공과 감리가 따르지 않으면 단순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내진 설계는 처음부터 ‘설계’되지 않았다
Sylmar 병원 붕괴 사건은 당시 건축계가 지진을 다루는 방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동안의 내진 설계는 정적인 하중을 기준으로 일정 수준의 진동까지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했으나, 실제 지진은 예상할 수 없는 방향과 강도로 흔들림을 유발하며, 구조물의 미세한 결함이나 설계의 사각지대를 드러낸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내진 설계의 정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 했다. 병원, 학교, 경찰서 같은 공공시설은 단지 무너지지 않게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재난 직후에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전력, 의료 장비, 통신망, 피난 동선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운영 연속성(Operational Continuity)’ 개념은 이때부터 설계기준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구조 설계 방식도 기존의 정적인 해석에서 동적 시뮬레이션 기반 해석으로 전환되었다. 건물이 받는 하중을 수치로 고정해서 계산하던 방식에서, 다양한 시나리오의 진동 조건에서 실제 건물이 어떻게 흔들리고 변형되는지를 시뮬레이션을 통해 분석하는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이 접근은 이후 성능 기반 설계(Performance-Based Design)로 발전했고, 건물의 용도, 중요도, 수용 인원 등에 따라 구조적 목표 성능을 설정하고 이를 충족하는 맞춤형 설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진 설계, 기술과 윤리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오늘날의 내진 설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해졌다. 건물 외형의 구조적 안정성뿐 아니라, 천장 마감재, 내부 벽체, 전기와 기계설비, 피난통로, 심지어 비상 발전기나 서버랙의 고정 상태까지 고려된다. 시뮬레이션은 기본이며, 내진 설계는 하나의 거대한 통합적 시스템 설계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현장에서 실제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감리와 유지관리 체계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사례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OSHPD(Office of Statewide Health Planning and Development) 제도이다. 이 시스템은 병원이 설계, 시공, 감리, 운영 단계에서 각각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심사를 받도록 하며, 감리자는 현장에 상주하며 실시간으로 구조적 안정성을 확인한다. 병원은 설계 도면만 통과해서는 안 되고, 실제 시공 현장과 구조해석 결과가 일치하는지 수차례 검증받아야 사용 승인을 받을 수 있다. OSHPD는 내진 안전을 제도화한 모델로, 국내 제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2016년 경주 지진과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내진 설계 기준은 명확히 강화되었지만, 전체 건축물 중 내진 보강이 완료된 비율은 아직 30%를 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88년 이전에 준공된 건물들 중에는 내진 설계 개념조차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이런 건물들이 주거용, 학교, 상가, 관공서 등 일상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여전히 많은 국민이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내진 설계를 더 이상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만 다룰 수 없다. 설계자의 윤리, 시공자의 책임, 감리의 실질성, 행정의 실행력, 시민의 인식까지 모두 통합된 윤리적 건축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안전을 위한 설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AI 기술의 도입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하면 실제 건물의 3D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시간 진동 반응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센서 기반 구조 모니터링 시스템은 미세한 변형까지 감지해 경고를 발생시킨다. 감리자 역시 AI가 분석한 데이터와 비교해 시공 상태의 정밀도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은 도입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선제적으로 안전 설계에 통합하려는 윤리적 태도와 제도적 의지다.
건축은 이제 단순히 짓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지키는 약속이며, 사회를 설계하는 윤리이고, 생존을 위한 집합적 지능이다.
결론: 더 이상 '신축이니까 안전하다'는 말은 없다
1971년의 병원 붕괴, 최근 미얀마의 참사. 공통점은 단순하다. 우리는 건물 외관만 보고 안전을 판단하고 싶어 한다. 새 건물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건물의 진짜 안전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설계, 시공, 유지관리, 그리고 사회의 감시체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내진 설계는 이제 단순한 건축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며, 생존 전략이며, 도시의 윤리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리고 그 윤리는 앞으로 AI 기술과 결합되어 더욱 정교하고 투명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