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건축설계의 윤리와 책임 재구성
도시의 얼굴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얼굴을 그리는 손이,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한때 설계는 고유한 창작 행위였다. 건축가는 자기만의 언어로 공간을 발명했고, 그 흔적은 도면과 파사드, 나아가 도시 풍경 속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AI는 그 역할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도시를 만드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한다. AI가 디자인에 깊숙이 개입하는 시대, 창작자란 누구이며, 그 권리는 어디까지 유효한가. 그리고 누군가 그려낸 건축물에 오류가 생겼을 때,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저작권이 사라진 도시’라는 개념을 출발점 삼아, 기술의 진화가 건축 설계와 도시계획의 윤리·안전·저작권 개념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성찰하려 한다. 과거 저작권 논쟁의 맥락을 짚고, AI 기반 설계의 현실과 한계를 살핀 뒤, 새 시대의 도시에서 설계자의 윤리와 책임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1. 건축 디자인 저작권의 역사와 긴장
건축에서 저작권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위대한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창조였다. 복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경외심의 표현이자 시대의 규범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건축은 ‘고유함’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1990년 건축저작권법(AWCPA)을 제정하며 건축물의 형태 자체를 보호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도면은 물론, 완공된 건물의 외형까지도 ‘창작물’로 본 것이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이를 지지했던 건 아니다.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건축은 공유된 언어 위에서 진화한다”라고 말하며, 과도한 저작권 보호가 창의적 파생을 막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재단은 디자인의 독창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보호는 시작되었다. 법적 분쟁도 뒤따랐다.
2005년, 예일대 학생 토마스 샤인의 ‘비틀림 타워’ 디자인이 유명 건축가 데이비드 차일즈의 자유의 탑 초기안과 유사하다는 논란이 일었다. 법은 샤인의 손을 들어주었고, 설계안은 철회됐다. 이 사건은 ‘학생’의 아이디어조차 창작으로 보호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유사 사례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정점을 찍은 건 2013년 자하 하디드의 왕징 SOHO 타워 사건이었다. 건설 중이던 베이징의 랜드마크를 거의 동일하게 복제한 ‘쌍둥이 타워’가 충칭에 등장한 것이다. 복제 개발사는 “우리는 베낀 것이 아니라 능가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디자인은 그저 형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유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발언이었다.
이러한 ‘듀플리텍처(duplitecture)’ 사례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영감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복제는 언제부터 위법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AI가 만들어낸 디자인은 이 경계를 훨씬 더 빠르고, 더 모호하게 넘나들기 때문이다.
2. AI 시대, 설계의 주체는 누구인가
최근 미국 애틀랜타의 한 주택단지 설계는 사람보다 먼저 AI가 시작했다. 시장분석부터 자재 선택까지. 설계 기간은 60% 단축되었고, 결과물은 건축 승인 절차까지 밟고 있다.
이제 많은 건축가들이 ‘공동 설계자(co-designer)’로 AI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AI를 통해 수백 개의 옵션을 동시에 확인하고, 규정에 맞는 도면을 자동 생성하며, 구조 시뮬레이션까지 사전에 예측한다.
효율은 올라갔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은 흐려졌다.
AI가 제안한 설계에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알고리즘을 만든 프로그래머일까? 데이터를 제공한 전문가일까? 아니면, 최종 도장을 찍은 건축가인가?
현행 법은 인간 건축가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다. 미국건축사협회(AIA) 역시, “AI가 설계를 바꾸고 있어도, 청구소송의 대상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명시한다.
결국 중요한 건 한 문장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3. AI가 배운 것들, 그리고 배워선 안 될 것들
AI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디자인을 학습한다. 그 과정에서 원작자의 동의를 얻는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도면을 올렸더니, 플랫폼 약관에 따라 자동으로 학습되고, 전혀 다른 프로젝트에 응용되는 일도 있다. 더 심각한 경우는, 타인의 설계를 몰래 업로드해 AI가 이를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디자인이 무차별적으로 재활용될수록, 설계자는 자신도 모르게 저작권 침해에 연루될 수 있다. AI는 블랙박스이고, 그 안의 데이터는 복잡하다. 사후에 검증은 가능하지만,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인간이 감당해야 한다.
AIA 윤리 강령은 말한다.
“동료의 아이디어와 업적을 존중하라.”
AI가 그 경계를 무너뜨린다면, 설계자는 기술의 편의를 누리는 대가로 윤리적 책임을 더 크게 짊어져야 한다.
4. 사라진 저작권, 그리고 책임의 공백
2025년 미국 저작권청은 이렇게 못 박았다.
“AI가 만든 결과물에 저작권을 인정하려면, 인간의 창의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
즉, AI가 만든 도시, AI가 그려낸 설계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 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즉 저작권이 사라진 도시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창작에 대한 대가가 사라지고, 설계자들은 더 이상 디자인을 ‘쌓지’ 않을 것이다.
경관은 획일화되고, 맥락은 희미해진다.
우리는 풍요로움 속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책임.
AI의 관여도가 높아질수록, 설계 실패에 대한 도의적·법적 책임은 애매해진다.
알고리즘을 쓴 사람이 모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아직, 아무도 명확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5. 도시를 위한 윤리적 설계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다음은 도시를 위한 다섯 가지 제안이다.
1. 저작권의 재정립
AI와 인간이 함께 만든 창작물에 대한 법적 기준을 새로 세워야 한다. 인간의 편집이 개입되었을 때만 저작권을 인정하는 기준, 그리고 무단 데이터 사용에 대한 책임 분배가 필요하다
2. 데이터 윤리 강화
AI가 학습하는 모든 데이터는 투명해야 한다. 공공 프로젝트라면 어떤 자료가 쓰였는지 공개하고, 검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설계자의 역할 전환
AI 시대의 건축가는 창작자가 아니라 ‘큐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AI가 제시한 수많은 옵션 중 맥락에 맞는 것을 골라내고, 인간의 통찰로 다듬어야 한다.
4. 공유 기반 창작 문화 구축
저작권을 넘어서 협업과 공유 중심의 창작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원 저작자에 대한 표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5. AI 설계 가이드라인 제정
AI가 참여한 설계라고 해서 검토 없이 통과되어선 안 된다. 설계 단계부터 인간의 판단이 필수적으로 개입되고, 검증된 AI 윤리 가이드라인이 존재해야 한다.
결론
AI는 건축의 경계를 바꾸고 있다. 창작자는 흐릿해지고, 디자인은 가속화되며, 책임은 분산된다.
하지만 기술의 확장은 곧 윤리의 확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이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도시의 창조와 책임을 다시 사유하는 시점.
‘저작권이 사라진 도시’라는 도발적인 문장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다시 써 내려가는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도시의 설계자는 여전히 우리다.
도면을 완성하는 마지막 선은, 인간의 손이 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