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니 오랜 시간인 것 확실한 데 그래도 모르는 건 사람의 마음이다. 그녀와 첫 만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백수로 빈둥거릴 때 친구 녀석이 형님이 서울에서 일한 사람을 소개하라고 하면서 날 불러준 게 계기가 되었다. 형님은 보세 무역을 하는 공장의 공장장으로 계셨다. 사실 일보다 집을 탈출하는 게 좋았고 서울이라는 곳이 더 매력적이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앞세워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서울은 꿈의 대상이었다. 친구들은 대학을 갔지만 집안 형편상 대학을 갈 수 없었다. 단지 막연하게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더라도 너희를 이길 수 있다는 야심 찬 꿈은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 근무를 계속하였다면 그녀와의 인연은 없었으리라. 운명은 회사가 부도가 나고 친구 형님께서 용인으로 회사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사랑을 꽃피우는 것도 운명처럼 다가오고 역사의 흐름처럼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서울 회사의 이름은 중앙 산업 이직한 곳은 경국 산업이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곳보다 큰 규모의 공장이었다. 위치는 용인에 있었다. 지금은 특례 시로 100만 명 인구지만 그때는 용인 읍으로 5만 명 정도로 기억한다. 세상만사가 처음부터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인생이 오히려 살아볼 만한 경주가 아닐까 싶다.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고 먼지를 뒤집어쓰는 비포장이었다. 경국 산업이 있던 남리 길도 마찬가지였다. 남사면이나 이동면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하루 2회 오전 오후였다. 시골이라 방세는 월 3천 원이면 보편 했고 5천 원이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50만 원 방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작은 공장 생활이라도 경험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옷을 만드는 1차 공정을 책임졌다. 서울. 수원의 개인 공장에서 1차 가공한 옷을 수거하고 검사하는 업무였다. 공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성비는 여성이 90% 정도이고 남성이 10%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별히 1차 공정엔 직원인 나를 제외하면 전부 여성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긴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얼굴은 발그레하게 진달래 잎 색처럼 고왔다. 모습만큼이나 업무에도 성실한 근로자로 정평이 났다. 언니와 회사 앞 가정집에 세 살이 하고 있었다. 엄마를 일찍 여의고 언니와 함께 일직부터 상급학교를 포기하고 공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계기는 장난 삼아 그녀의 주머니에 있는 쪽지 편지를 훔치면서이다. 편지를 준 사람은 옆 부서에서 일하던 동네 친구로 생일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친구를 위로하는 편지였다. 쪽지 편지를 읽는 순간 나의 모든 기능은 순간적으로 멎었고 나와 함께 가야 할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어쩜 그렇게도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왔을까? 운명은 그렇게 다가오고 난 그녀를 평생의 동반자로 생각했다.
‘그래 환경이 비슷해야 이해하고 살아가기 편할 거야’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편해’ 부모님을 생각하고 평생을 함께 가야 한다면 가정이 평화가 최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지가 비슷하니 서로에게 정도 갔고 그녀와 난 빠르게 사랑으로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 언니의 반대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번진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를 매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이대로 공장에서 젊음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다. 돈도 필요하고 어머니를 설득해야 하는 일도 남아있었지만 저질러보기로 했다. 어머니께 장문에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 집에 돈을 쓰지 않고 대학을 다닐 것이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별 계획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을 지났으니 세상도 바뀌었고 참고서는커녕 교과서도 없었다. 막연했지만 대학을 가야 한다는 열정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돈이 없어 변변하게 과목별 학습지도 사지 못하고 후배들이 보고 난 참고서를 빌려보면서 공부했다. 11월이 시험인데 9월부터 시작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용기가 가상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라고 했던가? 준비에 비하면 만족할 성적으로 국립전문대학을 입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약속도 지켜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교대를 졸업하고 오지에 가서 선생님을 하고픈 소망은 이루지 못해 아쉬웠다.
늦게 만학을 품고 대학을 갔다. 열정으로 공부하고 싶었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정치 상황으로 학교에는 탱크가 들어왔다. 학교는 휴교가 되고 백수가 되었다. 리포트 학점으로 세월을 보낸 서글픈 대학 생활이었다. 어차피 수업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참에 병역의무라도 하는 생각으로 3대 독자가 누릴 수 있는 병역의무 6개월을 마쳤다. 남성을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행할 의무를 다한 것이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인들 어렵게 살고 싶겠는가? 힘든 길을 누가 선택하겠는가? 그녀와 난 서울과 동해를 오가며 6년을 견디었다. 그리고 우린 결혼을 했다. 사랑이란 무서운 면역력은 긴 시간을 버티어 내는 원천이었다. 사랑이란 실체를 만져볼 수도 없고 맛으로 느껴볼 수도 없다. 마음으로 연결되어 관계가 형성되고 지금껏 진행되고 왔을 뿐이다.
40년이란 시간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후회되는 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흰머리만큼이나 생각해 보면 밉다. 하지만 주름진 얼굴은 잘 익어가는 열매처럼 인생 2막의 넉넉함을 표현해 주는 듯하다. 어느덧 함께 늙어가며 그녀는 10년만 젊었으면 무엇이든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이 큰소리친다.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건 나도 그래” 하며 장단을 맞춘다. 논리와 상관없이 맞장구를 친다. 행복은 이렇게 부부의 동질성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부부는 그래서 함께한 만큼 닮아가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녀와 만남과 결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지나온 세월은 물 흐르듯 가버렸다. 그녀와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일에서 벗어나 육체의 자유와 생활에서 해방되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아침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