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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티백 Oct 20. 2024

소중한 내 시간을 의미있는 일에 사용하고 싶어요.

4년차 프로덕트 디자이너, 유진 

아이를 빨리 낳은 게 잘한 것 같아요. 제가 이제는 경력 단절에 대한 걱정 없이 쭉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그게 제 삶에 많이 안정감을 주고 있어요. 
그냥 대충 돈 버는 하고 싶진 않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고 쓰임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면 일이 힘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 같아요. 단점은 좀 안 보려고 해요. 저도 완벽하지 않고 저도 분명히 저 사람한테 실수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을 하는 편이에요.


오늘은 유진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금융 AI 스타트업 딥서치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 신유진입니다.
 
어쩌다가 IT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셨어요?

처음 스타트업 쪽 일을 하게 된 거는 대학생 시절에 우연히 학교 포스터 붙어 있는 청년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사업 계획서 내는 게 있었어요. 흥미가 있어서 한 번 내봤다가 덜컥 돼가지고 이쪽에 발을 들이게 됐고요. 저희 학교에서 캠퍼스 CEO라는 수업이 있어요. 그 수업을 좀 들으면서 창업이 뭐고 어떻게 제품을 만들어야 되는지 PMF를 찾는 법 이런 것들을 많이 배우게 됐고 그러면서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었습니다.
 

어떤 아이템이 있으셨길래 덜컥 냈는데 된 거예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했던 대학생들 멤버십 카드 사업이 있었어요.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소상공인 분들한테 멤버십으로 가입을 해주시면은 저는 그분들의 가게를 학생들한테 홍보해 주고 학생들이 갖고 있는 카드를 제시하면 500원 할인, 만두 서비스 추가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멤버십 카드를 만들었었는데 그게 좀 잘 됐었고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그때 당시에는 지역 화폐 이런 게 처음 막 뜨고 있었어요. 그런 쪽으로 사업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게 돼가지고 했었죠.
 
어떤 직무로 참여하신 거예요?
그때는 대표였죠. 
 
청년 창업 같은 건가요?
그쵸. 그때는 사회적 기업 진흥원이라고 해서 그쪽에서 펀딩을 받아서 시작했어요.
 
그럼 전공이 뭐예요?
저는 미대 나왔어요. 조소과였고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어요?
대학 입시를 원하는 만큼 못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순수 미술은 아니구나 생각했죠.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을 주는 사업이나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대학에 붙은 데가 있었으니까 갔고 가서 한 1년 정도 학교 다녀보면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좀 찾아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예고를 나왔고 어렸을 때부터 미술만 쭉 했었기 때문에 내 적성이 뭔지 찾고 싶었었고 그래서 대학 들어가서 진짜 이것저것 많이 해봤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입학했던 때 당시에 학교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거든요. 어느 날 학교를 갔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거예요. 학교 총학생회는 저기 위에 탑을 쌓고 올라가 있고 질풍 노던 시기였던 때가 있었어요.
 
70년대 생은 아니죠? 너무 상상이 안 돼가지고
08학번인데 그때 한창 시위가 진짜 많았어요. FTA도 있었고 광우병 이런 것도 있었고 촛불 집회라는 게 있잖아요. 그랬던 시기였어요.

미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보셨다 하셨는데 그중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활동이 뭐였어요?
대학 생활이 약간 초기와 후기, 그러니까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에는 학생 운동 하는 거, 그래서 시위도 많이 나가고 학생회 출마도 했었고 그런 시간들을 좀 보냈었고 후기에는 창업 관련된 것들 이것저것 시도하고 그랬죠.
 

학생회가 총학생회죠? 예술대학 이런 거 아니고요. 조소과 전공인 사람들이 학생회장 나오고 이런 케이스가 있나요?
거의 없었어요. 저는 부총이었고 총학생 회장 언니는 법대였고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하고 예고 나오고 조소과 갔는데 학생 운동했다는 게 너무 놀라워요. 

저희 학교 정문 쪽이 되게 엄청 큰 공터라고 해야 하나? 그렇거든요. 지하 캠퍼스라고 해서 엄청 공간이 넓은데 어느 날 등교했더니 거기가 다 사람으로 가득 찼었어요. 그래서 ‘아 대학생이라면 이런 걸 알아야 되나’ 싶었어요. 

 
모든 총학생회 운동이 그런 건 아니지만 반 기업가 정신이 있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기업가가 되신 게 너무 놀라워요. 인식의 전환이 어떤 계기로 일어났는지 궁금해요.
일단은 학생회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노선에 대한 이견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계속 사회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내 적성이 뭔지 좀 찾고 싶고 내 전공도 살리고 싶었죠. 그래서 학생 운동을 그만하게 되면서 뭘 할까 신촌 바닥에서 술 먹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방황의 시기를 거치다가 우연히 하게 됐죠.
 

너무 놀라워요. 갑자기 이런 사업을 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냥 포스터를 보고 ‘어 저런 게 있네 몇 천만 원 준대’. 그리고 그때 저희 학교 경영대 지하에 사무실도 준대요. 저희 학교랑 사회적 기업 진흥원이랑 콜라보 해가지고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었거든요. 그래서 했는데 덜컥 돼가지고 어떻게 하지 하다가 뭐 이것저것 해보다가 사람도 뽑고 하다가 뭘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를 애초에 몰랐으니까 좀 배워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2학기에 캠퍼스 CEO 수업이라는 게 있다는 걸 방학 때 알게 돼서 같이 사업하기로 한 친구들한테 “이거 우리 같이 듣자.” 이렇게 해가지고 같이 듣고


우여곡절이 있으셨겠지만 학생 창업의 로망 같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갑자기 아이템이 생각나서 지원하고 같은 학교 친구들끼리 팀 빌딩도 하고 재미있으셨을 것 같아요.
처음은 좀 재밌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정말 모르는 상태니까 그냥 좌충우돌 이게 맞나 막 이러면서 그래서 좀 답답했고 제 스스로는 계속 다른 지원 사업 지원하고 그렇게 연명하게 되는 게 좀 안타까웠죠.
 

어떻게 마무리를 하게 되셨어요?
그 뒤로도 서울시에서도 또 지원을 받게 돼서 사무실도 옮기고 이런 일은 있었는데 이게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이게 맞나? 제가 대표다 보니까 직원들이 계속 책임지고 이걸 언제까지 해야 되지 그렇다고 해서 제가 너무 하고 싶었던 아이템을 한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까 계속 피봇하고.. 그래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맞나 그 고민이 되는 거예요. 제 롤에 대해서도 대표라는 게 사실 되게 외롭잖아요. 어쨌든 같이 하는 사람들을 계속 모티베이션 시켜줘야 되고 소액이지만 활동비를 지급하는데 그거에 비해서 다들 학생이고 하다 보니까 온전히 커밋먼트가 들어오지 않고 그런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또 말로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고민이 계속 됐었는데 바야흐로 대선의 시기가 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제가 학생회를 과 학생회부터 차근차근 한 게 아니고 총학생회부터 시작을 했었는데, 전략을 짜고 이슈를 만들고 이런 게 재미있었고 그게 제가 좀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같이 했던 친구들한테 이러저러 해서 나는 좀 정리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물론 그 친구들이 완전 여기 올인했던 상태면 저도 부담스러워서 말 못 했겠지만 다들 그냥 학생이고 약간 사이드 프로젝트처럼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를 해줬고 그래서 정리를 했어요. 
그때 당시에 대선에는 세 명의 유력 후보가 있었는데 한 분은 너무 아버지 후광으로 하시는 것 같고, 한 분은 왠지 중도에 하차하실 것 같다. 다른 한 분은 인상이 마음에 들어서 페이스북을 통해서 연락 했어요. 저는 이런 이런 사람이고 이번 선거에서 이런 전략을 가지고 선거에 임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일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락을 했더니 이력서 들고 한번 와보라고해서 면접을 보고 이제 일을 하게 됐어요.
 
능력자시네요.
그냥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선 캠프에 들어가서 전략을 같이 짠 거예요?
제가 배속된 데는 SNS 팀이었고 처음에는 후보 페이스북이랑 트위터랑 메시징 같이 기획하고 이미지 고정해서 올리고 좀 꾸미고 뭐 이런 거 하다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문OO TV를 만들게 됐어요. 그 팀이 새로 만들어지게 됐는데 회식 자리에서 제가 노는 모습을 보시고 와서 리포터 하라고 해서 후보자 일정을 같이 따라 다니면서 이 후보가 이 일정을 왜 하고 어떤 정책을 펴고 있고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정이 같이 따라오신 의원님들 인터뷰 하고 그런 것들 후보 일정 쫓아다니면서 진행하는 걸 했었습니다.


캠프에서 일하게 되면 아예 그쪽으로 넘어가거나 학을 떼고 다른 일을 하는 케이스들을 주로 봤거든요. 
그렇죠. 그때 당선이 됐다면 저도 청와대에 가는 꿈을 꿨겠지만 낙선을 했고 실의에 빠져 있었고요. 그때는 잘 안 되면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낙선을 하게 되면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때 당시에 저의 남편 그러니까 저의 남친에게 ‘나 그냥 유학 가려고’ 했더니 아 ‘나도 포닥을 갈 생각인데 그냥 같이 가자. 어차피 너도 공부해야 되지 않냐’ 남편 학교에는 그때 당시에 결혼한 학생들한테 주는 작은 아파트가 따로 있었어요. 그래서 크게 자금 마련이 필요하거나 이런 상황이 아니었고 부모님도 여자 혼자 가는 것에 대해서 약간 걱정들이 있으셨고 당장 목돈이 나가는 것보다 결혼해서 같이 나가면 더 적게 드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됐고요. 결혼을 해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생겼고 그래서 육아를 하는 루트를 타게 됩니다.


정말 롤러코스터 네요. 잘 한 일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빨리 낳은 것이라고 하셨는데, 결혼을 빨리 한 게 잘한 일일까 아니면 아이를 빨리 낳은 게 잘한 일일까 그게 궁금했었어요.
아이를 빨리 낳은 게 잘한 것 같아요. 그때 빨리 안 낳았으면 지금 제가 한창 아이를 낳아서 키울 시기거든요. 그때 캠프에서 일할 때도 다들 저 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여자는 결혼하게 되면 또 아이를 낳게 되면 일을 그만두거나 놓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배들이 좀 계셨었고 할 거면 아예 일찍 하거나 아예 늦게 하거나 그래라 애매하게 하지 마라 이런 조언들이 많이 있었어요. 후보 일정들 다니면서 보면 워킹맘들이 모여가지고 토론회 같은 것도 하기도 하고 육아 보육 정책에 대해서 논의하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도 ’아 그래 애는 빨리 낳거나 아예 늦게 낳아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빨리 낳아서 제가 이제는 경력 단절에 대한 걱정 없이 쭉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그게 제 삶에 많이 안정감을 주고 있어요. 
 

잘하셨어요. 애국도 하고.. 육아 후에 어떻게 복귀하게 되신 거예요?
둘째까지 낳았으니까 8년 정도 쉬었던 것 같아요. 육아는 만 3년 애착이라는 트렌드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주 양육자 - 꼭 엄마일 필요는 없어요. - 그 주 양육자가 만 3년간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아이가 필요할 때 바로바로 애착과 케어를 해줄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게 아이가 평생에 걸쳐서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라는 육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들이 있었고 그래서 저는 그런 시기를 충분히 가졌고 그 이후에는 학원도 다녔고요. 뭘 할까 하다가 개발도 한번 배워봤고.. 원래는 대학원 유학을 가려고 영어 공부도 하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남편이 한국에 있게 됐고요. 저도 동시에 한국에 있게 됐어요.


예고 나와서 조소과였잖아요. 근데 학원은 개발 배우고.. 뭘 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일단은 스타트업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 일할 때도 로망 같은 게 있었어요. 사실 디자인을 하고 기획을 하는 것은 결국 실물을 만들어내지는 않잖아요. 내 손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제품을 탄생시키는 거 해보고 싶었고 이 전반적인 과정을 어느 정도 내가 알아야 누군가랑 같이 일을 할 때도 좀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력 단절 전에는 캠프에서 일을 하시다가 경력 단절 후에 넥스트 커리어는 스타트업이다라고 정하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저희가 해외 유학을 가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남편이 그때 당시에 원자력 공학 전공이었어요. 근데 저희가 해외에 나가려고 할 때 대통령이 있었던 분이 탈원전 정책을 펴시는 거예요. 공교롭게도 제가 대선 캠프에 있던 그 분이셨어요. 약간 정책의 피해자가 되면서 정치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옳고 그름이라는 게 없다. 각자의 입장을 그냥 대변하는 거고 언제든 부수적인 피해자들이 나올 수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없잖아요. 그래서 나한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제가 정치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저를 싫어하는 사람 반, 저를 좋아하는 사람 반 그리고 공개적으로 정치인을 욕하는 게 너무 당연한 시대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스트레스를 애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고 또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정치는 하지 않아야겠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굳히게 됐어요. 그럼 뭘 할까 했을 때 제가 하고 싶었던 스타트업계 일을 좀 해야겠다. 근데 그러려면 뭐부터 시작을 해야 될까 했을 때 개발을 한번 배워봤던 거 같고 디자인은 또 다시 한 번 배워봤던 거였고 그래서 둘 다 해봤어요. 디자인 에이전시에 처음 들어가서 디자인도 하고 그때 퍼블리셔를 같이 병행을 하면서 둘 다 배워봤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스타트 업계로 이제 이직을 하게 됐었죠.


탈원전 때문에 남편의 꿈이 무산되기 전까지는 정치를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나 봐요?
약간은 있었어요. 정책 입안보다는 그냥 전략 짜는 게 재미있었고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짜는 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럼 관심이 있는 건 정치라기보다는 그런 전략들이었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기업에서도 할 만한 일들이 있었을 텐데.. 청와대에서 하고 싶었던 건가요?
글쎄요. 기업에 들어가서 마케팅을 하기에는 제가 전공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 쪽으로는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런 걸 하려면 대학원을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저에게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저는 육아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고민을 하긴 했어요. 대학원을 갈까 말까 근데 그냥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게 나한테 좀 유리한 선택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죠.


일하면서 도전적이거나 어려웠던 경험 혹은 뿌듯했던 경험으로 극 초기 PMF를 찾는 TF를 이끌었을 때를 꼽아주셨는데 이게 회사를 다니시면서 한 경험인지 아니면 창업하셨을 때 했던 경험인지가 궁금했어요.
둘 다였던 것 같아요. 옛날에 창업했을 때는 그냥 대회에 나가 상을 받거나 어떤 경진 대회나 이런 거 그리고 지원 사업에 선정되는 거는 그냥..
 
바로 바로 됐어요?

그때는 창업붐이 불기 전이어서 기회들이 조금 쉽게 주어졌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완전 창업붐이 불었고 제가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고, 좋아하고 막 다운 받고 그런 제품을 만들어내기까지 단계를 가지 못했고 그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회사에 들어와서도 처음에는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 TF에 소속이 돼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계속 가설을 세우고 그거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커뮤니티에 저희가 만든 MVP를 링크를 뿌리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리액션을 하는지 데이터 분석 툴을 보면서 확인을 하고 있고 듀레이션은 얼마나 나오고 바운스레이션은 어떻고 PV는 얼마나 나오고 이런 것들을 측정해 가면서 조금씩 제품을 다듬고 있는데 그런 과정들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사실 지표들이 안 나와서 피봇을 좀 여러 번 했었고 그런 데서 오는 팀원들의 지침, 저도 지쳤고 그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들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마케팅 예산 사용 없이 매일 최소 2천 명의 유저가 들어오는 그 방법이 뭔가요? 
그때 만들었던 제품 같은 경우에는 어떤 사회 이슈 있잖아요. 논란이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가장 먼저 그거에 관한 관련 정보들이 막 올라오는 그런 곳에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었었던 거고 그러다 보니까 링크를 뿌리고 예를 들어서 A라는 셀레브리티가 음주운전을 했어요. 그러면 이 음주운전을 한 증거 영상이라던가 목격담 뭐 그런 것들이 쭉 올라오잖아요. 그런 걸 저희가 다 아카이빙을 해 가지고 그런 걸 올려요. 그러면은 그 링크를 사람들한테 커뮤니티에서 이런 셀레브리티 음주운전 사건 총정리 해서 올리죠.  근데 그 아이템을 접게 된 거는 이게 듀레이션이 안 나오기도 했고 이거를 자동화 그러니까 결국에는 저희가 계속 하는 게 아니고 유저들이 직접 올리게 해야 되고 자동적으로 진짜 긁어 오는 시스템들이 필요하고 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좀 어렵고 저희가 목표로 설정했던 지표들이 있었는데 페이지 뷰라던가 뭐 리텐션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저희가 목표했던 거에 미달이 돼서 아 좀 다른 걸 해볼까 해서 피봇을 하게 됐죠.
 
일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 주셨어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많은 사람들한테 임팩트를 주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셨어요?

맞아요. 맞아요. 그렇기도 하고 사실 저는 엄마다 보니까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아이들에게 제가 같이 있어주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건 알기 때문에 제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소중한 내 시간을 썼을 때 그냥 대충 돈 버는 하고 싶진 않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고 쓰임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제품이 꼭 좋은 가치를 지향하는 건 아니라고 아닌 프로덕트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유진님이 지향하시는 가치의 프로덕트는 어떤 결인지 궁금해요.

사용하면 재밌어 하고 이걸 통해서 뭔가 자기만의 가치를 얻어가는 거

미국에 유행하는 19금 SNS가 있잖아요. 그런 건 자주 사용하고 사람들 나름대로 일차적인 쾌락일지언정 많은 쾌락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프로덕트는 아니실 것 같아서.
그런 프로덕트라 할지라도 저는 충분히 의미는 있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에요. 사실 성산업이라는 게 정말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산업이고 누군가에게 굉장히 필요한 어떤 역할을 하고 담당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항상 음지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그런 걸 양지로 끌어올리고 어쨌든 그런 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그래도 좀 떳떳하게 수익 구조를 마련해 가는 것들은 저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결과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 탓을 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 부정적인 자극을 받는다고 말씀 주셨는데 오늘 얘기를 하다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자극을 받으셔도 되게 동료랑 협업을 유연하게 잘 해주실 하실 것 같은데 어떻게 평소에 대처하세요?
어.. 싸웁니다.
 
어떻게 싸우세요? 

웁니다. 솔직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편이고요. 가식적으로 그냥 적당히 예의 차려서 말하기보다는 당연히 예의는 지키지만 제가 화가 정말 많이 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스타일이에요. 저도 이런 제가 싫고 여자는 감정적이다 이런 평가도 받기 싫어서 웬만해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저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진짜 제가 정말로 그것 때문에 힘들면 얘기를 솔직하게하고 그러다 보니까 좀 감정이 올라오고 그래서 미리 말해요. “내가 원래 화가 나면 눈물이 나는 스타일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렇게 하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좀 솔직하게 다 얘기하고 그러다 보니까 상대도 정말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짜 깊은 감정까지 다 얘기하고 그래서 화해하고 다시 일합니다. 저는 지금 일하는 분들과는 진짜 악감정이 하나도 없어요. 이제는 서로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저 사람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해도 그런 의도가 아니라 별 생각 없이 그냥 던지는 말이라는 거 이런 것도 이해도가 서로 좀 올라가고 그런 것 같아요. 여전히 뭐 투닥 거릴 때도 있죠. 근데 너무 선을 넘어서 저 사람 꼴 베기 싫거나 같이 일 못 하겠거나 팀 바꿔주세요. 이런 감정까지는 안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원래 성향이 좀 그러신 거예요?
저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면 일이 힘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 같아요. 단점은 좀 안 보려고 하고 왜냐하면 저도 완벽하지 않고 저도 분명히 저 사람한테 실수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을 하는 편이에요.


오늘 유진님이랑 얘기하면서 느낀 건 되게 잔잔하신데 되게 열정적인 게
아 맞아요. 맞아요. 회사 동료들과 카페를 갔는데 거기에 전시돼 있는 책이 있었어요. 그 책 중에 무기력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많습니다. 이런 책이 있었거든요. 그 책을 들고 사진 좀 찍으래요. 왜요? 그랬더니 딱 저를 표현하는 책이라고.. 제가 체력 이슈가 좀 있어요. 좀 피곤해 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렇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옛날에는 한 번도 피곤해 보인다거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런 말을 못 들어봤으니까요. 워킹맘은 참 고단합니다.


워킹맘은 힘들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경력 단절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경력 단절인 상태에서 어떠셨고 어떻게 이 시기를 넘기려고 하셨는지가 좀 궁금해요.
그때는 코로나 시기였습니다.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공부를 해 가지고 자격증도 따고 준비해서 막 취업의 문을 두드리던 순간 코로나가 왔어요. 그러면서 학교가 문을 닫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집에 있었고 아예 처음에는 밖을 나가지도 못했잖아요. 학교가 문을 닫는 거는 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첫 1년은 정신이 없었던 것 같고 그 다음 해가 됐는데 너무 우울한 거예요. 내 삶은 그냥 이대로 끝인가 나는 그냥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가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고 그래서 우울증 치료도 받았었고요. 이대로 그냥 있으면 이 감정만 깊어질 것 같아서 뭐라도 해보자. 두드려라도 보자 해서 포트폴리오 만들었고 지원서 넣고 여기저기 진짜 말 그대로 진짜 여기저기 두드렸어요. 그때 당시에 저희 남편도 그렇고 스타트업계 일하고 있는, 계속 일했던 분들은 다들 좋은 자리에 계셨고 도와주겠다고들 많이 했는데 민폐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진짜로 거의 10년 가까이 쉬었으니까 그때 당시 제 실력으로 입증된 게 하나도 없으니깐요. 누구 낙하산으로 들어가면 소개해 준 그 사람한테 폐가 되니깐요. 그래서 그냥 맨 땅에 헤딩으로 다 지원을 했었고 그중에서 운 좋게 어떤 에이전시에서 주 4회 재택, 주 1회 출근하는 조건으로 제안을 주신 거예요. 사실 규모가 큰 다른 데도 되긴 했는데 여기가 내가 처음 다시 일을 시작하기에 아이들도 어느 정도 내가 일하는 거에 좀 적응을 하면서 같이 병행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이렇게 일을 시작하게 됐죠.


오늘 같이 참여하신 소감이 어떠셨어요?
저의 솔직한 경험을 너무 다 얘기했던 것 같아서 좀 부끄러워요. 여기 계신 분들이 되게 잘 이끌어 주셔가지고 너무 부끄러웠던 얘기까지 다 꺼내놨던 것 같아 가지고 부끄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왔던 제 삶을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던 계기가 됐던 것 같아서 되게 감사하고 좋아요. 말은 엄청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것 같이 말했는데 아직 제가 원하는 성과들은 이루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말한 거 꼭 지켜야겠다. 이런 다짐도 좀 하게 됐던 것 같고 좋은 자리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REDIT

글 오잉

인터뷰 디디, 뚜까, 오잉, 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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