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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강 riverofwisdom Jul 15. 2024

찬란한 엄마

Art&Article 2024 July Edition



 가난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적당한 결핍을 겪으며 자랐다. 장마 때 화장실이 역류하지는 않았어도 남동생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우리 가족은 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세입자들을 위한 공용 화장실은 집 마당 한 구석에 있었다. 집이 언덕길  꼭대기에 자리해서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빗물은 언덕을 타고 빠르게 빠르게 아래로 흘러갔다. 그 동네의 대부분 집들은 그랬다. 연탄을 갈던 엄마를,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어린 나를 기억한다. 붉게 달아오른 연탄 집게, 뽀얀 상아색으로 변한 연탄과 새까만 연탄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엄마는 지하 단칸방에서 연탄을 가는 찰나에도 예뻤다. 나는 우리 엄마가 이 세상 엄마들 중 가장 예쁘다는 생각에 혼자 우쭐하기도 했다. 엄마 나이 스물 여섯, 일곱 쯤이었을 거다. 


 엄마는 어딜가나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가난 속에서도 구김살이 없었고, 도도한 듯 보이지만 일단 사람을 사귀고 나면 모난 구석이 없어서 누구나 엄마를 좋아했다. 


 그런 엄마가 단단히 화가 났던 시기가 있었다. 여섯 살 내 동생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였다. 천성이 밝고 낙천적인 아이라 선생님들을 잘 따르고 선생님들도 아이를 예뻐했다. 그 때 해당  어린이집에서 아동 학대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는 그 때의 모든 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데리러 간 어느 날 내가 본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보통 동생이 집에 오는 시간보다 늦게 동생을 데리러 갔다. 불꺼진 어느 교실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교실 문을 열어보았다. 모르는 아이가 붙박이장 안에서 쌓인 이불 위에 앉아 숨죽여 울고 있었다. 거기 있지 말고 나오라는 내 말에 아이는 “선생님이 도깨비 방에 있으랬어요.”하며 눈물 묻은 얼굴로 그 곳에 남았다. 곧 만난 내 동생은 밝은 얼굴로 달려 나왔다. 다른 선생님들도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 어린이집에는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이 많았다. 구에서 설립한 곳이라서 교육비가 저렴했던 데다 특별히 맞벌이 가정의 아동들을 위해 늦은 시간까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 있던 아이들에게는 서러운 일도 여러 차례 생겼던 모양이다. 어린이집 교사들과 몇몇 교사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간식을 먹는 사이, 늦게까지 남아 있던 아이들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만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누구의 엄마도 원장에게 직접 항의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아빠는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내가 살던 그 동네에서 화이트 칼라로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를 둔 우리집은 대체로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엄마는 일하지 않고 내 동생과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동생의 어린이집에서 자모회장으로 활동하며 일손을 보탰다. 바자회를 열고 폐식용유로 직접 만든 빨래 비누를 판매했다. 엄마는 그 수익금으로 쌀을 사서 어린이집에 다니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기부도 했고, 어린이집 벽을 벽화로 꾸며 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상당수 엄마들은 사정이 달랐다. 누구네는 새벽부터 장사를 했고, 누구네 아빠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늦게까지 유치원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생계로 바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저녁 시간에 잠시 아이를 보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기 바빴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뒷백없는 그들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일일이 들을 시간적 여유도, 문제를 제기 하거나 해결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자모회장인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엄마는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직접 나섰다. 원장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사과와 개선책 마련을 촉구했다. 자모회장과 몇몇 자모회원들이 어린이집 원장과 선생들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지금 내 아이만 잘 대접받고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점을 지금 내가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 일은 방관자들과 시간 속에 묻혀 버릴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또다시 어두운 방 한켠에서 또다른 아이가 흐느끼게 될 거라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일에 달려들었다. 이 일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지역 정치인, 취재를 요청하는 언론인, 같은 내용을 자꾸만 묻는 도돌이표 조사 기관도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이 일을 사건화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어린이집에서 차별과 학대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원장은 곧바로 엄마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명예 훼손의 정의조차 모르던 엄마는 소환장을 받고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엄마는 경찰청과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검찰청에서 제일 먼저 마주한 사람은 검찰 수사관, 계장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엄마를 다그쳤다. 


“아줌마! 아줌마 어쩌려고 그랬어요? 예?!”

“뭐… 뭐가요?” 토끼눈이 된 엄마가 당황하며 물었다.

“아니 왜 어린이집 원장님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닙니까? 그거 명예훼손이에요! 이렇게 명예훼손 시키면 아줌마는 감옥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줌마 애들 다 못 보고! 알아요, 알아?”

“아, 아니…. 저.. 저는… 그 어린이집에서 애들한테 잘못 하니까,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애를 차별하고 구석에 넣고 그러면 안되잖아요. 애가 잘못 했으면 혼을 내긴 해야 하지만...”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장이라는 사람은 다시 벼락같이 소리쳤다.

“아니 이 아줌마 아직도 상황파악 못하시네~ 그랬건 안그랬건 이건 명예훼손이라구요, 명.예.훼.손! 아줌마가 왜 그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가서 남 욕하면 그게 명예훼손이 되는겁니다.”

“그런거예요?”

“옆집 남편이 바람 핀 걸 보고 그걸 이웃에게 말해도 그건 명예 훼손 죄가 되는거예요! 아줌마가 잘못 한거에요, 이거.”


 엄마는 학교 때도 혼나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딱 한번 혼난 거라고는 국민학교 입학 즈음 본인 이름을 “이ㅇㅇ”이 아니라 “10ㅇㅇ”이라고 적었을 때가 고작이었다. 그걸 보신 학교 선생님은 “에라이, 이 녀석아! 집에 가서 한글 공부나 더 하고 와!” 하고 돌려 보내셨다. 


 엄마는 검사에게서 더 조사를 받았다. 검사는 명예 훼손의 정의를 재차 설명했다. 엄마 역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한 일이더라도 그 것이 법에 위배되는 일이 었다면  그 벌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라는 검사의 말에 엄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이 마음을 얘기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검사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앞의 탁자를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나는! 아무리 친구들이 미국이 살기 좋고, 캐나다가 좋아서 이민을 간다고 해도! 속으로는 ‘그래도 내 나라가 내 엄마 품처럼 최고지.’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한 일이 정의가 아니라 그저 명예 훼손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벌! 내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자식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남 배려할 것 없이 네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이기적으로 살라.’고 가르칠 겁니다.”라고 또렷이 내뱉었다. 3년 가까이 이어진 조사 끝에 검사는 엄마에게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가끔 그 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엄마는 놀랍게도 그 때의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 후회는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당해서가 아니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엄마는 우연히 해임된 그 원장을 보았다. 지친 눈빛으로 쓸쓸히 거리를 걷던 그녀를 본 엄마는 그녀가 안쓰럽고 개인적으로는 미안함을 느꼈다. 

‘저 사람도 열심히 살면서 그 자리까지 갔을텐데 내가 왜 누군가의 인생에 가슴 아픈 사연의 주동자가 되었을까……’

 엄마는 정의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흔들어 놓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난리통 속에서도 엄마는 굳건했다. 고소 당했던 당시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쯤이었다. 엄마가 속으로는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지 이제는 안다. 그러나 당시 초등학생었던 나는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엄마는 여전히 나와 동생을 위해 밥을 지었고, 공부를 가르쳤고, 헌신적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우리를 자신의 어려움으로부터 철저히 분리시켰다. 엄마는 여전히 찬란하게 엄마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다.


ⓒ Art&Article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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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Haekang (River of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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