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73-78-95
「내가 만일」, 「그 사랑 잊을 순 없겠죠」의 사랑과 「너를 사랑한 이유」에 등장하는 사랑은 기실 다른 사랑이다. 「생의 의미를 찾아서」의 씁쓸한 두려움이 깊은 잔향을 남겼기 때문에, 뒤이어 등장하는 「내가 만일」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안치환의 화장기 없는 보컬과, 절제되어서 도리어 세련미가 넘치는 세션이, 함께 만드는 조화는, 이 두 개의 사랑을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으며, ‘천천히’ 합일시키는 듯하다.
물론 이 앨범이 지닌 본래의 대쪽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수풀을 헤치고」의 바삭한 록 기타 리듬에 더불어 외치는 안치환의 일갈은 ‘후일담’의 낭만에 취해 부패하는 지금, 이 순간을 일갈한다. 「당당하게」의 후반부를 휘몰아치는 록 세션과 안치환의 외침은, 종이에 인쇄된 선언문의 문장보다 훨씬 강력하고 생생하게 정당함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다.
전작의 레코딩 세션이나 엔지니어를 비롯한 인원이 또한 거의 바뀌지 않고(코러스만 약간 변경이 되었을 따름이다.) 참여했는데도 이 앨범의 사운드가 한층 빛나는 이유는 결국 안치환의 곡 덕분일 테다. 「고향집에서」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가 담긴 곡마저도, 안치환의 멜로디는 빛난다. 정겨움과 쓸쓸함이 물씬 풍기는 안치환의 시선을 무람없이 떠받드는 멜로디는 이 앨범이 지닌 굳센 의지에 걸맞는 음악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동엽의 시를 노래로 만든 (U2의 영향이 짙은) 「시인과 소년」의 사운드나, 김남주의 시를 노래로 만드는 (피아노 반주의 정갈한 맛이 일품인) 「물따라 나도 가면서」의 토속적인 언어는 그가 (포크를 위시한) 민중 가요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소위 ‘슬라이딩 주법’의 기타가 인상적인) 「그대만을 위한 노래」와 같은 노래가 지닌 개인적인 맥락이 이 ‘저항과 구도의 길’에 ‘음악적’ 당위성을 부여했다. 「겨울나무」는 그가 전에 몸담은 그룹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곡을 연상시키지만, 이와 같은 개인적인 맥락 덕분에 (강요와 시대적 요구에 의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도자의 개인적인 고통과 맞닿은 듯하다. 이 앨범에 이르러 그이의 노래는 ‘슬로건’의 함정에서 벗어나 그이의 인장이 확실한 예술 작품으로 거듭났다. 「평행선」은 그와 같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이가 건진 숨은 보석 같은 곡이다.
전작에서 맹활약한 (조동익을 중심으로 한) 세션은 이 앨범에서도 거의 그대로 참여하며 여전히 맹활약한다. 「당당하게」의 흐르는 기타 피크 연주는 정교하며, 「수풀을 헤치고」의 기타 톤과 무람없이 잘 어우러진, 하이햇 플레이를 곁들인 드럼 연주는 기본에 충실하기에 되려 독창적인 사운드를 창안한다. 「겨울나무」의 간주에 등장하는 플랫리스 베이스의 솔로 연주는 곡이 지닌 격정(과 탐탐 드럼의 공간감)을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당당하게」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권혁진의 보컬이 두드러지는) ‘콜 앤 리스폰스’의 코러스나, 우순실의 코러스가 페이드아웃하는 「생의 의미를 찾아서」의 후반부를 다 잡는 대목은 지금 들어도 소름 돋는다.
「너를 사랑한 이유 B」의 (긴장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로 끝나는 앨범은 길 위의 생과 사랑과 저항을 솔직히 적은 안부 편지 같다. 안치환은 그 편지를 우리에게 보내며 우리의 축 처진 어깨를 흔든다. 아직 싸울 시간이 남아있다고. 그러니 다시 한번 일어나 외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