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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Jul 20. 2024

디어(Deer) 다이어리

7월 20일

옛날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특히나 초등학교 .


  암기를 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종이를 검게 물들인 중학교 시절의 내 샤프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절로 인다. 그이의 희생정신은 내 성적표에 고스란히 적힌 채 종이 아래 묻혀있다. 그 희생으로 인해 중, 고등학교 때 일은 잘 기억한다.    


 '기억의 궁전'에도 집사는 필요한 법이다.『오뒷세이아』에 자주 등장하는 ‘추수할 수 없는 바다’와, ‘포도주 빛으로 빛나는 바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오뒷세이아의 '막대한' 여정을 환기시키는 부표다.    

  

  내 스마트키는 이제 내 글이다. 대학 입학 전에 쓴 글을 괴물이 등장하는 공포영화 보듯이 보면서도, 결국 쓰는 게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쓴 일기장을 이사할 때 버렸다. 초록색 바탕에 개나리 사진이 들어간 된 첫 일기장은 ‘일기장’이라고 인쇄된 하얀 글씨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무수한 동어반복과, 위선으로 점철된 일기는 제법 여러 권이었고, 선생님의 '붉은' 코멘트 또한 그 점을 곧잘 지적했다.


  그때의 나는 일기가 지겹기만 했다. ‘선생님에게 검사 맡기 싫어서’라는 말로 변명이 되지 않았다. 몰아 쓰는 일기를 창작하는 일은 어린 내게 고통 그 자체였다.       

  

  전공으로 글쓰기를 고를 나이에 이르러서야, 나는 일기가 그날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마음을 죄다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 중에서 중요한 감정과 그걸 품은 계기만 간단히 골라 쓰기.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남는 장면만 그 전후만을 쓰기. 하고 싶은 말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정해서 확실하게 쓰기. 대충 생각나는 방법만 꼽아도 세 가지나 된다.


  요컨대 일기는 글 쓰듯 쓰는 게 아니라, 가계부처럼 써야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상상 속의 초등학교 일기장은 변모를 거듭했다. '무수한 동어반복'은 '어린 시절의 언어습관'으로, '위선'은 '글실력'으로 포장된 것이었다. 그러자 버린 일기장이 아까워졌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찾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콩쿠르 형제의 존재하지 않는 일기까지 창작하며 그들 문학의 단점과 장점을 묘파한 프루스트는 도리어 콩쿠르 형제의 일기를 다른 차원의 텍스트로 끌어올리지 않던가.      


  어떻게 남는지는 별개의 일이다. 뭐든 기록하면 남는 법이다. 가계부든, 일기든, 혹은 이중장부든.


  거의 20년 동안의 기억을 대가로 얻은 교훈이 이것이라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사금보다 힘들게 얻은 교훈을 들고 나는 황망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동시에 먹는다. 이만한 대가를 치렀으니 이건 잊어먹지 않고 평생 들고 다니겠지. 명품 백보다 비싼 명품 교훈을 손에 들면 최소한 잊어먹진 않겠지.


  물건을 너무 자주 잊어버려서 싼 제품을 살 수밖에 없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는 잠시 모른 체할 생각이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 더 늘렸다간 내가 짓눌린다. 그러니 얼른 뿔 숨기고 도망가야지. 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 종소리 안 들려. 경종 안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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