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플래쉬 Aug 02. 2024

핍박받는 집단 속 특혜 받는 개인

영화 <피아니스트>와 <그린북>의 시사점




2003년 개봉한 영화 <피아니스트>와 2019년 개봉한 <그린북>은 상이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사한 플롯을 보인다.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 배경의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생존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그린북>은 1962년 흑인 차별이 만연하던 미국 배경의 흑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서사를 보여준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차별받는 집단 속 우대를 받는 개인'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피아니스트라는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핍박당하는 집단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이들은,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인물 설정은 극적으로 두 가지의 효과를 보여준다. 





상황의 잔인성 부각


어떠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특정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인간을 박해한 역사는 현대에 이르러 그 비도덕성이 더욱 조명된다. <피아니스트>와 <그린북> 모두 불합리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데, 그 과정에서 '특혜 받는 개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역설적으로 그가 뿌리내린 집단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더욱 부각한다는 특징이 있다. 


먼저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나치 세력이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을 침탈하기 이전 저명한 피아니스트로서 가족들과 화목한 생활을 이어오던 '스필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는다.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과정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스필만'은 여러 가지 특혜를 받는다. 이 특혜라는 것이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서 가까스로 죽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특혜를 의미한다. 모든 가족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열차에 실릴 때도 혼자 수용소행을 피하거나, 기존 인맥들의 도움으로 나치군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마련한다거나. 몇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스필만'은 주변인들의 죽음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의 목격자가 되어 비인간적인 시대상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그린북>은 흑인 차별이 만연하던 미국 사회를 살아가던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생존권을 유린당하였다면, <그린북>의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일상에 고착화된 흑인차별을 겪는다. 한 명의 성공한 연주자로서 존중받는 '돈 셜리'의 입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흑인 동지들을 바라보도록 하는 극적 장치는 당시 시대상의 불합리함을 강력히 고발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저명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돈 셜리' 역시 그들과 비슷한 처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섬찟함을 자아내며, 너무나도 평범한 하나의 인간이 단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당하는 시대의 모순을 관객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에서 도출되는 극적 긴장감


차별받는 집단 우대받는 개인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은 같은 유대인 신분을 가진 주변인 사이에서 혼자만 생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겪는다. 또한 은둔해야 하는 상황에서 년간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그는, 피아니스트라는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마저 잃어버린다. 삶의 의미와도 같은 예술이라 하더라도 자체가 없으면 허상에 불과하기에, '스필만'은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다. 유대인이라는 태생적 정체성과, 피아니스트라는 예술적 정체성을 잃은 '스필만'은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전반부와 달리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 오로지 생존만을 갈망하는 공허한 존재로 변모한다. 그러나 독일 장교 '빌름 호젠펠트' 앞에서 죽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연주를 끝낸 순간, 그는 비로소 유대인이며, 동시에 피아니스트인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이 정체성을 완벽히 부정당한 채 은둔생활을 했다면, <그린북>의 '돈 셜리'는 극 중 내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상황을 맞이한다. 저명한 피아니스트로 자신을 추켜세우면서도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다는 관계자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부정의 속에서 '돈 셜리'는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백인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생활에 익숙해진 '돈 셜리'는 흑인들의 삶에도 완벽히 융화될 수 없어, 백인상류층과 흑인계급 그 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속할 곳을 찾지 못한다. 이러한 '돈 셜리'의 고뇌는 그의 연주에서도 드러난다. 백인들이 좋아하는 가벼운 재즈음악만을 연주하던 그는, 사실 쇼팽의 클래식을 연주하는 것을 갈망한다. 그리고 '돈 셜리'는 흑인들이 모인 작은 술집에서 쇼팽의 '겨울바람'을 연주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그리고 흑인들 역시 '돈 셜리'의 연주에 크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며, '돈 셜리'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비로소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그린북>의 시사점


집단에 대한 비윤리적인 차별 행위를 주욱 고발하던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인간들이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피아니스트>의 '스필만'과 '호젠펠트', <그린북>의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가 그렇다. 집단적 광기에 매몰되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역사를 회고한 영화는 극 중 내내 소리친다. 모두 다 같은 '인간'일뿐이라고. 


실제로 홀로코스트에 의해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철학 속에서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것이 뚜렷해진다. '레비나스'의 말에 따르면, 타자를 어떠한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그 모든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비단 유대인과 흑인뿐만이 아니더라도 인간을 어떠한 틀에 가두어 배척의 대상으로 삼는 풍조는 현 사회에서도 만연하다. 이러한 비합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의 무한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어떠한 출신, 특성 몇 가지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인간을 속단하고자 하는 것은 곧 집단주의의 폭력을 답습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영화에 대한 영화, 삶에 대한 회고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