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정의는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주열 군의 주검에]
보기 위한 동공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박힌 중량을 아시는가?
비인간과 올가니즘(Organism)이 빛은
이위일체의
이 기괴한 신
[유치환 안공에 포탄을 꽂은 꽃]
마산 상업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던 김주열.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끝내 그는 그 소식을 전달받지 못 한다.
차가운 바닷물속에서 그는 시신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억울한 죽음에 깊은 한 때문이었을까 얼음 처럼 차가운 바닷물 때문이었을까
한 달이 넘은 죽음은 그 날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죽음은 뜨거운 불길로 살아나 4.19의 혁명으로 산화한다.
그의 죽음을 유기했던 박종표라는 인물은 일제 강점기때 부터 경찰일을 하던 헌병보 출신이었다.
처참했던 그의 시신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다.
혁명의 후폭풍 속에서 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결국 감형되어 7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94년까지 서면의 번화가에서 조용히 식당을 운영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반면 김주열 열사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상실감으로 술에 매달렸고 5년뒤에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김주열 열사의 형도 시위중 주열의 손을 놓쳐 잃어버린 것에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다가 병에 걸려 그의 아버지의 나이 만큼 살아 43세에 사망하였다.
살아 남았던 그의 가족들은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내내 빨갱이로 상시 감시를 받으며 고생했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감시를 피해 서울로 이사를 갔고 서울에서도 여러곳을 옮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끈질기고 집요한 감시는 자그마치 26년이 지나 1986년 6월 항쟁 이후에야 멈췄다.
이 와중에 둘째 누나 김경자도 요절했다.
이제 남은 가족은 막내인 김길열과 누나 김영자만 살았 남았다.
역사의 큰 맥락을 훑어 보다보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어버릴때가 있다
4.19혁명이라는 굵직한 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그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4.19 혁명의 혜택을 받았다.
그날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지금은 또 다시 격랑의 세월 속에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 들을 한 순간 잃어버리게 될 상황이긴 하지만 피와 숭고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역사가 쉽사리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하고 역사의 흐름 앞에 반동했던 이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희생자가 살아남아 치욕을 받는 잘못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되는 것 처럼 잘못된 선택에 대한 처벌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