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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북극 Dec 18. 2024

기억에 대한 오해 / 그날 밤 취조실에서의 대화


"우리 중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까?"


특별한 억양이나 느낌이 묻어나지 않는 사무적인 어투로 그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는 다소 지루하고 피곤해 보이는 까칠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알 수 없는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러는 것은 나와 대면하지 않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확신에 찬듯한 질문 때문인지 나는 어쩌면 그가 말하는 우리를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당신이 지난번 말했던 마룻바닥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틈에 대한 것을 저는 여전히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질문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오래된 하수관에서 맡아 본적 있는 퀴퀴한 냄새가 방안 가득 번지는 듯했다. 

낡고 깨어져 틈틈이 벌어진 마룻바닥에 몸을 누이고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던 그때의 기억도 찰나처럼 지나갔다.

물론 찰나처럼 지나간 기억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원래 존재 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져 버렸다.

기억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그곳의 냄새는 여전히 흐릿한 흔적을 방안에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마룻바닥과 그 틈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물어 온 질문에 대해서도 답할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이라...' 나는 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입안에서 그 말들을 대뇌 었다.


방안은 다시 고요해지고 테이블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 변화도 없다.

문득 이 방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꼼작도 하지 않았고 시선도 흔들림 없이 어느 한 지점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들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방이고 테이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던 취조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로서의 이 장소에 있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 장소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밝지 않은 방안은 습하면서도 공기의 밀도가 다른 곳보다는 몇 배로 짙은 지 숨 쉬는데 힘을 들여야 했다.

가구가 테이블 밖에 없어서였겠지만 작은 방에서 그가 하는 말들은 벽 이곳저곳에 부딪혀서 사방에서 울리다가 점점이 사라져 갔다.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의 말들은 어디로 사라져 가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말하던 마룻바닥과 틈이라는 것이 이 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의 말들이 점점이 사라져 가는 것은 이해가 될 듯도 했다. 


문득, 오래전 누군가가 나에게 경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던 그의 경고는 마룻바닥의 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지 일깨워 주었다. 사소해 보이는 그 작은 틈들이 나의 말들과 우리의 순간들을 어떻게 집어 삼키는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려주었다.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능력과 사라져 가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의 말들과 함께, 그의 말들은 영혼처럼 마룻바닥에 난 틈으로 사라져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일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그것보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여기 오기 전의 기억이 말끔히 지워져 있다.

전후맥락이 사라진 문장처럼 이해되지 않는 이곳은 어디인가?

꼼작도 없이 앉아 있는 테이블 건너편의 그는 나의 의문을 알아 차린 것인지 입가에 미소 같은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물론 어둡고 습한 방안의 상황에 내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는 테이블 위의 가상의 어느 공간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미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대로 돌이 된 것 만 같은 그의 모습이 점점이 사라져 가던 목소리처럼 멀어져 가는 것 처럼보였다.

어쩌면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의 질문은 나에게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테이블 위의 가상의 공간 어딘가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 이곳저곳에 부딪혀 점점이 사라져 간 그의 목소리는 가상의 공간, 그곳으로 흘러들어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가상의 공간, 어느 곳에서 누군가는 그에게 그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이미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이 멀어져 가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나의 생각들이 틀리지 않았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맥락이 사라진 이 공간에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것은 그의 목소리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 이방인으로서 어쩌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마룻바닥이라고 입속에서만 소리 내어 봤던 목소리를 힘을 주어 말해봤지만 역시나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꼼작도 없던 그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는 조금의 움직임도 할 수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꼼작도 없던 그가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인지 흐릿하게 눈이 흔들린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기억해야 될 겁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질문대신 걱정의 말이 그에게서 흘러나왔지만, 그가 그 말을 한것인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어느 순간 부터 흐릿하게 촛점을 잃은 피사체 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사방의 벽에 부딪히며 이 공간을 메우다가 점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말들이 사라지기 전에 나 역시도 이곳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하는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취조실도 그도 테이블 위의 가상의 공간도 점점이 사라지던 그의 목소리도 어쩌면 나 자신조차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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