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문장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신중하게 고르느라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떠나갈 때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사라지던 날
당신은 기억을 저에게 맡겨 놓고 갔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기억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매일 당신의 기억을 닦고 떠올려서 그것이 낡아 흩어져 바스라 지지 않도록 매일을 새롭게
되새김질하였습니다."
"매일을 닦고 떠올린다고 해서 기억이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마룻바닥의 틈으로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당신과의 약속이었으니까요"
"아 물론 그 약속은 입 밖으로 소리내어 한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았다는 것을, 지금의 당신은 알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는 지금과 같은 대화의 형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할 많은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제한되어 이렇게 마주 앉아 소리 내어 대화를 나는 것 만이 유일한 소통의 수단 일뿐입니다. 물론 그 조차 제한 된다는 것을 이제는 당신도 알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미동도 없이 그저 테이블의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대해서 나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까?
"어쩌면…"
나 역시 신중한 다음문장을 위해 말없이 다음 문장을 고르고 있었다.
"어쩌면 꿈속의 그(그녀)는 네가 아니었을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당신이 처음 그 말을 했을 때 저도 그것이 우리 중 누군가 아닐까라고 의심했지만 그것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당신이 사라지고, 아니 떠나간 후 우리가 미처 예상 못했던 너무도 먼 곳까지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갈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불러보기도 하고 예언 같은 징후로도 당신에게 알려 보려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당신에게 가 닿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마치 우리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했습니다. 직접적이 대화의 방식이 아니면 당신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마저도 우리의 대화라는 것이 메타포로 가득해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지금과 같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제한적이라는 것은 여러 번의 대화에서 당신도 이제 알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꿈속에서 만났던 그(그녀)는 당신이 우리와 헤어진 뒤 경험한 무언가에서 얻어진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우리의 추측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했지만 당신이 사라지던 날 이후로의 당신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예언으로 당신에게 전달하려 했던 우리의 존재가 굴절되어 투영된 것은 아닐까 라는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 또한 확신할 순 없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당신의 꿈속에 그(그녀)는 당신이 떠나온 자 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그녀)는 그 나름대로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볼 뿐입니다."
"내가떠나온 자라면 그래서 이렇게 먼 곳 까지 와 버린 사람이라면 지금 여기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 중 누구도 결국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꼭 돌아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 중 누구라도 기억하고 기억 속에서 소통하는 법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와 당신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입니다."
"그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만의 슬픔이라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미동도 없던 그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일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공간이라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방인데도 그의 뒤로 작은 그림자 같은 것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방에는 촛불이나 다른 불빛이라는 것도 딱히 없었는데도 완벽한 어둠은 아니다. 창도 없는 곳이지만 어딘가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와 방안에 작은 빛을 채워 놓고 있었다.
그 작은 빛으로 방안은 완전한 어둠 속이 아니었다.
미동도 없는 그의 뒤로 작은 그림자가 만들어져 일렁이고 있다는 것은어쩌면 내 마음이 일으킨 착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매번 재촉하는 말만 해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 말 뒤로 방안은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다.
"당신이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 중 누구를 만났는지입니다."
"당신은 너무 먼 곳을 갔습니다."
"이제 당신은 매일 같이 기억을 닦고 떠올리던 내가 알던 당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고 당신도 어렴풋이 우리에게 돌아오려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너무 멀리 가버려서 돌아올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기억해… 요 / 왜곡된 기억이라도... 잊지 말아...요 / 우리의 대화가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말이 끊어지듯 뭉그러져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마저도 결국에는아스라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사라졌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나는 텅 빈 어둠으로 바뀌어 버린 그의 자리에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