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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오해/아침이 오는 방에서

부재: 그들의 밤

by 봄날의 북극

까무룩 잠이 들었던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방안의 어둠은 밀도가 옅어져 물을 탄 먹물처럼 흐릿해졌다. 엷어진 어둠만큼 사물의 윤곽은 현실감이 살아나듯 뚜렷해진다. 다시 잠들기 전 어둠의 장막 너머에서 나의 손을 기다리던 그(녀)의 기척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지금 잠들지 않으면, 아침에는 몹시 곤란할 거라는 생각이 흐릿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는 못 했지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피곤하진 않았다.


방안에 스며든 빛으로 봤을 때 평상시 일어나는 시간에 다가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침대에서 두어 번 뒹굴 거린 후 마지못해 이불을 살짝 걷어 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봄이나 가을처럼 사각거리는 이불의 감촉은 아니었지만 포근한 온기 덕분에 마음이 안심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빠져나온 이불은 형상 그대로 죽음처럼 놓여있다. 겨울이 끝나가는 중이라 이불 밖은 추위를 느낄 만큼 서늘하진 않다.

이불의 감촉이 포근해서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 기시감처럼 떠오른 서늘하고 거친 담요의 촉감이 생생히 떠올랐다.


죽음 같은 감촉이라고 느꼈었던 것 같은데, 옅은 빛이 스며들던 그곳의 시간도 아침이 오기 바로 직전의 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밤이라고 하기에는 흘러버린 시간이 깊어 이른 새벽과 아침의 경계 그 쯤의 시간으로 추측되던 그곳.

지금 내 방에 있는 창과 같은 것이 거기에도 있었다.


방의 창은 앞동 건물에 가려져 온전히 햇살이 흘러들지 않는다. 창이라는 것이 햇살을 받아들여 실내를 밝히고 계절에 따라 햇볕의 양을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방의 창은 그러한 역할로서는 충분하지 못 한 그저 하나의 프레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보려 해도 농담 같은 건물의 외벽만이 보일 뿐이다. 창을 열어 둔다고 해도 전혀 외부와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벽일 뿐이다.

"그래 그것은 또 하나의 벽일 뿐이지." 아직 남아 있는 미약한 어둠 너머에서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제대로 된 햇살이 스며들진 못 하더라도 희미한 빛은 조금씩 더 명확해지고 있다. 이제 곧 아침이 되고 스마트폰의 알림이 울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 방에는 아날로그시계가 없다. 착착착 시간을 밀어내는 초침소리도 당연히 없다. 초침 소리가 없어도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착. 착. 착. 밀려 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시계 초침 소리 하나 없는 방안은 조용하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경계가 불명확한 어둠의 장막 뒤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는 기척이 남아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어쩌면 다른 층의 누군가의 기척일지도 모른다.

창밖으로는 멀리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음이 들려온다. 세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작은 나의 방은 모든 것이 여전히 잠들어 있고 깨어있는 것은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아직 일어날 필요도 없고, 어떤 결정을 내려할 긴급성도 없다. 이불을 완전히 한쪽으로 걷어내고 나른한 기지개를 켠다. 몸 안에 잠의 흔적이 남아 이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고 싶어 한다. 천장의 어렴풋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아직 남아 있는 장막 뒤의 잔상을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꿈의 잔상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흐릿한 어둠마저도 시간의 속도에 떠밀려 완전히 사라지려 하고 있다. 어둠의 장막이 걷어지고 나면 그(녀)는 어디로 사라질 건지 궁금해졌다. 시계 초침이 소리 없이도 흘러가는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한 세상을 깨우고, 꿈과 현실, 소란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제 어둠의 장막은 완전히 사라졌다.

손끝을 가볍게 접었다 펴고 목을 천천히 돌려 보면서 몸의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점검했다. 그 순간 휴대폰의 알람이 울린다. 조용한 방 안의 공기를 뒤흔들고 어둠의 장막뒤에 서성였던 그(녀)도 소란한 알람에 완전한 종식처럼 사라졌다.

오늘이 시작되는 순간의 출발선위에 서있다.


뒤처져 먼 과거 속에서 맴돌질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휴대폰의 알람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존재의 순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 도착하지 못 한 내일의 시간은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내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시작의 출발선이 서글퍼진다. 짤그락 거리던 동전 소리와 나의 손을 기다렸던 그(녀)의 손길도 아침 햇살에 흩어져 버린다.


오늘의 시간. 지금 내가 생각해야 될 것은 지금의 시간.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창으로서의 역할로는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창을 연다. 농담처럼 무심한 콘크리트 외벽은 여전히 거기 있다. 햇살은 태양이 좀 더 고도를 높이는 쯔음에는 이곳에도 도달할 것이다. 콘크리트 벽에 막혀있어도 바람이 슬며시 불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농담 같은 콘크리트에 부딪혀 흘러 들어오지만 바람에는 농담의 흔적은 느껴지질 않는다. 멀리 들려왔던 자동차 소음은 점점 현실감이 있게 들려왔고 간간히 새소리도 섞여 들려온다.


새소리! 그래 분명 새소리다. 소리만으로 틀림없이 괭이부리갈매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고하듯 낮게 날아오르던 그 괭이부리갈매기일리가 없다.

습지와도 멀고, 바다와도 한 참 먼 이곳에 괭이부리갈매기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는 걸 안다.

어쩌면 길고양이의 울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데 어느 시(時) 어느 장소의 아침은 어떻게 시작될까?

시계초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던 그곳은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었다. 프레임일 뿐이지만 창을 열어 볼 수 있다면 그곳에도 아침이 올까?

죽음과도 같았으나, 희미한 햇살의 흔적이 남아있던 거친 담요를 걷어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본다.

보이지 않는 통로를 따라 톱니바퀴가 맞물려 밀려나가듯 시간이 앞으로 떠밀려 나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과거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한 곳에서 제각각의 속도로 뒤엉켜 흐르고 있다.

내가 잡으려 했던 손과 그(녀)가 내밀었던 손은 그렇게 그곳에 존재했었지만 시간의 길 위에서 엇갈리고 있다. 나의 아침과 그(녀) 혹은 그들의 밤은 끝나지 않을, 도달하지 못할 내일의 시간 혹은 어둠의 장막 속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그 시간의 흔적을 나는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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