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And Wise

by 인아

올해 상반기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나와의 조우]라고 정의해보고 싶다. 두 곳의 센터에서 심리상담과 집단미술치료상담을 진행하며 나와 좀 더 내밀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깊은 속내를 처음 보는 상담사에게 털어놓고 내 입으로 내뱉은 말들이 다시 내 귀에 꽂히고, 다시 상담사의 입으로 내 얘기를 해석해 듣는 일은 일정 부분 고통이 수반되었다.


나는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의 지속적인 걱정거리를 들어주는 일을 힘들어했다. 두어 번까지는 들어주며 위로해 주고 같이 욕해주려고 노력하지만 똑같은 상황에 대한 하소연이 반복되면 그 사람과 내 앞에 정지선을 그어버린다. 이 때문에 종종 회사 일을 하소연하던 친언니와 티격태격 다투기도 했었다. 나는 ‘내가 못된 건가? 내가 공감능력이 없는 걸까?’ 생각하며 내 성격을 탓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내가 공감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일이 아닌데, 그저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에도 깊게 공감해 버려서 내 일처럼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지속적인 하소연도 그냥 들어 넘기지 못하고 버겁기만 했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나도 주위에 가장 큰 문젯거리나 고민거리를 말하지 않는 편이다. 사소한 얘기들은 편하게 하지만 오히려 가장 큰 고민들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그 상황이 상기되기 때문에 후련하기보다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큰일일수록 가슴에 묵혀둔다. 꽁꽁 숨겨두고 차라리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나에겐 더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몇십 년간 꽁꽁 숨겨둔 일을 아직 라포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꺼내어 놓는 것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직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만 봉인된 나의 내면아이가 깨어나려고 꿈틀거렸다. 아직 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따뜻하게 내 밀어주고 싶은 손도 없었다.


상담이 지속되면서 상담사에게 라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숙한 곳의 얘기가 튀어나왔고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머릿속으로 또 수많은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상담 중에 털어놓는 얘기들이 안전하게 봉인될 것임을 믿지만 혹시나 언제 어느 순간 나를 향한 칼날이 되어 찌를까 봐 두렵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상담과정을 진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자꾸 입속에서 멜로디가 맴돌았다. 분명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노래 같은데 도무지 노래 제목도 가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사 첫 도입부의 멜로디만 흥얼거리기 시작한 지 몇 시간째, 불현듯 제목과 가수의 이름이 떠올랐다.


The Alan Parsons Project의 [Old And Wise]


첫 도입부의 가사 As far as my eyes can see가 입속에서 맴돌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음악감상 어플을 켜고 그 곡을 무한반복으로 재생했다. 20대 초반 영화 [비열한 거리]의 OST에서 처음 접하고 한동안 자주 들었던 곡이었다. 왜 갑자기 이 노래의 멜로디가 불쑥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반가웠다. 그날 저녁 아이를 재우고 작은 볼륨으로 노래를 켜놓고 책을 읽었다. 책의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Old And Wise의 멜로디만이 내 귀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 노래를 자주 들었을 20대 초반에서 중반 시절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옷, 그 옷을 입고 만났던 YC, YC와 손을 잡고 걸었던 어스름한 명동, 시청, 광화문 일대의 풍경들. 여유로워 보였던 거리와 사람들, 그날 날씨와 바람, 공기의 냄새까지… 한꺼번에 우르르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불 켜진 방 한가운데에 그 당시의 내가 와 있었다.


머릿속으로 의미가 와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는 책 속의 활자를 따라가고 귀는 Old And Wise의 노래를 들으며 옆 눈으로는 힐끔힐끔 내 옆에 와 누워있는 그 애를 훔쳐봤다. 놀랐고 조금은 반갑기도 했지만 부담스러웠다. 아직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먼저 나를 찾아와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절교한 친구와 막다른 골목길에서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용기 없는 나는 그 애를 그냥 내 옆에 둔 채로 활자에 집중하려고 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상하고도 묘한 경험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상한 경험. 내가 경험한 이 순간을 과연 입 밖으로 꺼낸다면 누가 과연 이해해 줄까?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혹시 자기 전에 내가 맥주라도 마신 건 아닐까 곱씹어봤었다.


그다음 상담시간에 상담사 선생님께 나의 경험을 얘기해 보았다. 묵묵히 들어주시던 상담사 선생님께서 경험을 나눠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났고 이제는 Old And Wise를 밤에 들어도 그 아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조금 더 Old해지고 Wise 되기를, 그 아이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줄 준비가 되기를 기다려주는가 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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