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그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이는 잘 크지?"
다짜고짜 원망 섞인 소리가 들려온다.
"왜 안 알려 주셨어요? 애 키우는 거 이렇게 힘든걸.."
지방 출신인 그녀는 대학을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 자취를 하고 있었고,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한 것에 너무 기뻐하고 있었다. 다들 영혼 없이 다니던 직장에 혼자 너무 생기 발랄해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신입이 너무 차분한 것도 이상하지. 발랄한 게 정상이긴 하지.. 누군가 내뱉었던 말이었다.
아무튼 우당탕탕 그녀의 신입생활이 흘러가고 세월이 흘러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친정이 지방이라 도움 없이 오로지 부부 둘만이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제가 어린이집에 맡기고요, 저녁에는 신랑이 조금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찾아와요. 부장님은 시댁에서 애를 봐주셔서 좀 편하셨지요?"
"아이고, 두 부부가 참 기특하네. 그래도 신랑이 일찍 퇴근할 수 있어 다행이네, 힘들겠지만 한 이십 년 잘 버텨봐 "
"이십 년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반문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층이 다른 각자의 갈길을 간다.
이십 년 만의 독립
그때 나는 5년이면 육아독립이 가능할 줄 알았다.
아이를 낳고 시댁 옆동으로 이사 간 나는 5년 정도 시댁옆에서 애를 키우고 나면 애를 데리고 살고 싶은 곳에서 살며 혼자 양육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딸하나 키우며 맞벌이하는 부부한테는 혼자 있는 딸아이에게 누군가 양육의 손길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게 시댁옆에서 20년이 흘렀다.
워낙 걱정이 많은 부부는 딸 하나를 방학 때나 집에 혼자 두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고, 둘이면 조금 나은데 외동딸이라 더 불안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렇게 이십 년이 흘러 아이가 강남에 있는 재수학원에서 재수를 하게 되면서 통학이 멀다는 이유로 강남으로 이사를 오면서 강북의 시댁과는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사를 오니 옆집 노 부부가 6살 남짓한 여자아이 하나를 열심히 데리고 다니신다.
알고 보니 맞벌이하는 딸아이가 육아 도움을 받기 위해 옆동으로 이사를 왔고, 외손녀딸 하나를 양육하고 계신 것이었다.
강북이나 강남이나 양육 전쟁은 마찬가지이다.
"아이고 수고 많으셔요, 저는 시어머니가 고등학교 끝까지 애를 봐주셨어요."
깜짝 놀란 아주머니가 눈을 끔벅끔벅하신다.
"아니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 3학년 정도 되면 혼자 학원도 다니고 그 정도면 되지 않아요? 고등학교까지 키워줘야 해요?"
"저는 딸하나라 불안해서 그렇게 못했던 것 같아요."
놀란 옆집아주머니가 묻더니 끊임없이 한탄한다.
"아이고, 난 몰라. 지금도 힘들어. 우리 부부 곧 도망갈 거야. 알아서 하라고 해. 고등학교까지 이십 년? 난 몰라.."
너무 당황하며 거의 울부짖는 옆집 노부부를 보며 새삼 이십 년간 고생한 시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맞벌이 부부 대신 할머니들이 육아를 하는 건 정말 대단한 희생이다. 기껏 힘들게 자식들 키워서 독립시켜 놓았더니 결혼하고 애를 낳고 자꾸 옆으로 기어 들어온다. 황혼의 자유는 어디 가고 손주를 업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힘들게 키워온 자식들 보고 일을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다. 어차피 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대도시에서 어느 한쪽만 벌어서 먹고사는 것이 풍족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식은 평생 돌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십 년 가지고는 어림없을 수도 있다.
옆집 노부부 이야기를 딸아이에게 하니, 언제나 시크한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엄마, 난 중학교 이후로 할머니 손길이 필요한 적이 없었어. 엄마의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지 내 필요가 아니었어. 방학 때 혼자 있으면 어때? 오히려 하고 싶은 거 잔소리 없이 편하게 다하고 좋지. 내가 정시로 대학을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학원가를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가 가는 것이 더 필요했지 할머니 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리고 그렇게 했어야 우리 집도 아파트값이 더 올라 부자 되는 거 아니었어? 엄마, 나를 위해 시댁옆에서 20년간 희생했다고 말하지 마. 그건 엄마 편하자고 한 선택이었고 엄마의 판단미스야."
그래 너 잘났다. 오늘도 자기 혼자 큰 줄 아는 딸내미는 그렇게 나에게 일침을 가한다. 듣자 듣자 하니 혈압 오르는 소리만 골라하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니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닌지라 여기 글을 쓰며 부들거리고 있다.
"너 내가 네가 한 말들 다 글로 써서 남겨서 꼭 복수할 거야"
"엄마, 그러지 마 제말 내 얘기하지 마, 진짜 그러면 엄마 고소할 거야"
아침식탁에서 복수와 고소가 남발하는 모녀사이라... 참 살벌하다. 누굴닯았을까. 나를 닮은 것 같다.
좀 더 크면 알겠지. 한 사람의 성인을 키워내기 위해 주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었다는 걸. 그걸 깨달았을 때쯤이면 너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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