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러 삼반수의 시작은..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곧잘 하는 우등생이었다.
중학교 내내 전과목 올 A를 받아 오길래 나는 외고를 갈 것을 권유했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과를 가겠다고 유명 자사고를 지원하였고 그 뒤 불합격을 하였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원래 실력이 그것밖에 안되었던 것일까?
동네 내신이 힘들다는 과학중점고에 진학한 뒤 만족스럽지 않은 첫 중간고사 내신성적을 보고는 아이는 좌절했던 것 같다.
'엄마 난 정시러야.. 이 내신 가지곤 안 되겠어. 딱 재수각이야'
속으론 나도 일반고에서 이 내신이라니 이러다 대입이 4년이 걸리겠군 걱정했지만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에게 끝까지 내신을 놓지 말자며 다독이곤 했었다.
과학중점고에는 영재고, 과고등을 목표로 공부하다가 탈락한 아이들이 대거 와 있고 이미 과학, 수학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아이들이 많다. 내신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문과로 돌릴 것을 권유하였고 언제나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 아이이기에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결국 아이도 현실을 받아들여 문과로 진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길한 예상은 한치도 벗어나지 못해 형편없는 내신으로 강제 정시러가 된 딸아이는 첫 수능을 기가 막히게 말아 드시고, 재수 정시러가 되었다.
두 번째 본 수능은 본인의 평소 모의고사 성적보다 못한 성적에 크게 좌절하였지만 난 이미 아이에 대한 기대를 많이 내려놓은 상태라 누구나 알만한 인서울 대학에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왔음에 안도하였다.
문제는 원서를 쓰면서 발생하였다.
인문계였던 딸아이에게 나는 나오자마자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나오는 교대나 간호대를 갈 것을 권하였고, 딸아이는 그 두 개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두 개만 제외하고는 다 괜찮다고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 오래 다녀 나름 직급이 높다 보니 종종 담당 부서 직원 채용 시 면접관으로 들어가곤 한다.
수많은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읽다 보면 너무나 다들 안타깝다.
"청년 인턴을 여러 곳에서 하셨는데 청년인턴이 뭔가요?"
유명대학 출신의 지원자가 계속 청년인턴만 하고 있길래 물어보았다.
"공공기관에서 하는 인턴을 청년인턴이라고 합니다. "
졸업하신 지 좀 되셨는데 그럼 그동안은 무엇을 하고 있으셨나요?
"공공기관에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태도도 좋고 학벌도 좋고 말도 잘하고 본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던 지원자의 면접을 마무리하려 질문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제가 고쳐야 할 점이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지원자였으니 주저 않고 대답해 준다.
"전혀 부족한 부분 없으시고, 면접 태도도 좋으시고 스펙도 좋으시고 훌륭하십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러나 그 지원자는 결국 채용되지 않았다. 실무진에서 다른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다.
신입직원을 뽑는 자리이다. 나는 태도만 좋고 자질만 좋으면 뽑아 가르치면 충분히 배울 수 있으니 채용하고 싶었으나, 실무진에서는 인턴이라도 비슷한 일을 해본 사람을 선호했다. 하긴 가르치는 것도 지치겠지. 급한데 하나하나 가르치기도 힘들고, 신입을 뽑는데 비슷한 경력이 있는 경력직 같은 신입이라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안전하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복수전공은 기본이요, 토익에, OA자격증에, 취직할 때까지 졸업유예에, 국가인턴에, 계약직에, 문과생들이 너무 고생하는 현실이 보이고 쌓인 이력서 중 뽑히는 사람은 고작 한 명. 일반대를 졸업 후 방황을 할 딸아이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이상한 논리로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문과생들 졸업 후 자리를 제대로 못 잡는 경우가 많아. 너같이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경우는 방향성도 잘 못 잡고 방황하기도 해. 문송합니다가 괜히 나왔겠어?
간호대나 교대 졸업 후 그 일을 안 해도 괜찮아. 그냥 자격증이나 면허증만 따. 그것 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야. 졸업 후는 너 하고 싶은 것을 해.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때는 의대나 약대를 갈 성적이 안되고, 문과에서 로스쿨이나 회계사 자격증을 딸 실력이 안된다면 그나마 졸업 후 취업 가능성이 큰 것이 이 두 개라고 생각했다.
물론 철저히 아이의 적성을 무시한 권고이자 강요이긴 하였다. 아이는 벌레하나 못 잡을 정도로 간호사 하고는 맞지 않고, 평소 날카롭고 뼈 때리는 팩트 공격이 주 특기로 꿈과 희망을 주는 초등교사하고는 안 어울린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그러는 나는 지금 직업이 적성에 맞는가? 아니다. 그냥 맞춰 갔을 뿐이다. 나도 문과 졸업생으로 28년째 회사에서 자격증 없이 버티고 있다. 힘들지만 먹고는 살아야기에. 자아성취 이전에 먹고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원서 접수 시 나군만은 이 엄마의 말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여 강제로 **교대에 안정권을 원서접수를 하고
가, 다군은 아이뜻대로 일반대를 넣었다.
문제는 가군의 일반대와 나군의 교대를 합격하고 나서였다. 아이가 엄마가 가지도 않을 교대를 나군에 넣는 바람에 교대 가기 싫어 가군을 원치 않는 대학에 하향 지원하였고, 자기의 원서영역을 엄마가 망쳤다며 나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자격증이 있는 직업이 중요하다고 어릴 때는 변호사가 돼라 하더니 성적이 안될 것 같으니 약대로 그것도 안될 것 같으니 교대, 간호대로 마치 자격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대를 붙었어도 인생이 망한 것처럼 느껴지고, 엄마가 자격증이 없는 콤플렉스를 딸아이에게 심어 주었고 교대는 정말 죽어도 가기 싫다며 새벽 12시가 넘어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키워 주셨던 시댁에 가있었으며 친할머니에게 엄마한테 알리지 말라고 했다며 어머니가 딸아이 몰래 연락을 주셨다.
아무튼 지금은 딸과 삼반수라는 극적 합의에 도달하여 딸은 일반대에 등록을 하여 일 학기를 다녔고, 아쉬워하는 딸아이에 의견에 수긍하여 삼반수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목적 없이 대학레벨만을 높이는 삼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딸아이의 원망을 평생 받을 수는 없기에 학원비도 대 주고 더 이상의 원서영역에는 간섭을 안 하기로 하였지만 아직도 나는 인문계라면 누구보다 방향성을 잘 잡고 빨리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운 여름 새벽부터 일어나 딸아이의 아침을 챙긴다. 학원이 방학인데도 가서 공부하겠다는 삼수생을 뒷바라지하느라 오늘도 일찍 일어난다. 나라면 대학생활을 즐기며 좀 더 재미있게 놀텐데 왜 사서 고생인지 싶다가 그래도 딴짓하는 것도 아니고 방학인데 공부하러 새벽부터 나가는 딸아이가 안쓰럽기도 대견하기도 하다.
엄마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딸은 딸아이만의 속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엄마의 걱정은 꼰대의 쓸데없는 잔소리이겠지. 너무 앞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 성실하고 정직한 아이이니 잘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이제는 조용히 응원을 해 줘야겠다고 이 글을 쓰면서 다짐해 본다.
"아이들의 앞날을 끌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언제든 한 시절, 세들어 살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는 노력이다.
죄책감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간단하다.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주어라."
-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