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래 버틴 사람들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윤여정 님은 이혼 후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쉼 없이 연기를 했고, 국민 엄마이자 배우인 김해숙 님은 인터뷰에서 사업실패 후 빚을 갚기 위해 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다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회사일로 한참 힘들어 퇴사하겠다고 한 선배한테 징징대었더니 그 선배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무조건 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버텨.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된 후에는 아이가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수 있겠지만 성인까지 교육을 시키는 건 부모의 몫이니까.
회사생활이 힘들고 치사하다고? 자아성취 하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목표를 회사생활로 두지 말고 회사생활을 애를 잘 키우기 위한 돈을 버는 수단으로 여겨.
그리고 애가 크고 나면 나중에 네가 일한 것이 아이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나의 직장생활의 목표를 일단 아이 고등학교 졸업시키기로 정하였다.
직장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맘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일단 아이 고등졸업 때까지만 버티면'이라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아이가 고등을 졸업하고 재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삼반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일단 아이를 낳아 놓았으면 그 책임감에 끝은 없다는 것이다.
법륜스님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으면 딱 손을 놓고 독립을 시키라는데 아직 이 땅의 부모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가 최소 직장을 잡을 때까지는 아무래도 다들 외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내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을 했었는지 곧 깨달았다.
돈은 벌어도 끝이 없고 나한테 쓰는 돈은 없는 것 같은데, 아이는 재수 삼수를 계속하고 있으며 남편과 나는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이 땅의 50대 회사원이다.
게다가 남편은 차를 바꾸고 싶단다.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는데 퇴직하면 영영 못 바꿀 테니 이참에 저지르고 싶단다.
그동안 아이 키우는 데에만 집중해 본인한테 쓴 돈이 없으니 허망하다고 하는데, 사실 나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어서 차마 말릴 수 없어 그러자고 하였다.
이제는 정년까지 10년 남은 나만을 위한 새로운 동기를 찾기로 하였다.
우선 최저 연금 보험을 10년간 매달 붙기 시작 하였다. 일정금액을 10년 부으면 70세부터 일정금액을 죽을 때까지 받는 구조였다. 100세시대니까 70세부터 30년 간만이라도 국민연금 외 용돈을 탄다면 든든할 것 같았다.
때마침 혹자는 우리의 수명이 120에서 130세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건강치 못한 몸으로 오래 사는 것은 재앙이지만 돈마저 없다면 더 큰일이지 않은가?
왠지 나는 백세를 넘어 장수할 것 만 같았다.
주위에서는 결국 수령금액이 높은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해지하고 투자를 하라고 조언을 해 준다. 그러나 이미 투자에 자신이 없는 나는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것 같이 뿌듯함마져 느껴진다.
이제부터 남은 직장생활 10년은 무조건 나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다.
그동안 못해본 골프도 배우고 피부과도 가야지.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던 후배들이 갑자기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본다.
나만의 설득 매뉴얼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경우나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은 당연히 축하해 준다.
다만 이런저런 회사일로 맘이 상해서 혹은 상사와의 불화 때문에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직원들은 감정이 격해진 경우 많다.
이런 경우 그 자리에서 말린다고 듣지 않는다. 그러니 기한을 두는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우선 집 살 때까지만 나랑 같이 다니자고 하거나 집이 있는 친구에게는 은행대출을 갚을 때까지만, 아이가 있는 후배에게는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일단 고등학교 졸업 시킬 때까지만 함께 하자고 회유한다.
대부분의 경우엔 그런 감정의 폭풍우와 격정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직장생활을 또 유지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듯.
*
오래전 퇴직한 직장상사의 부고가 얼마 전 들려왔다.
이미 발인이 된 후였다. 퇴직 후 몇 번 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긴 임원의 소식이었다.
누구보다 건강하시고 여행을 좋아하시며 모두가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부러워하던 분이셨다.
퇴사 한지 좀 오래되셔서 그랬는지 회사에 정식으로 부고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암 투병생활을 하셨다는 소문만 전해 들었다.
하루종일 멍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회사생활은 끝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평생 회사에 충성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퇴직하신 지 좀되었다고 회사에 부고소식하나 제때 전해지지 않다니.
더불어 자식 잘 키워 놓으시고 손주 보며 행복하게 사시는 줄 알았는데 인간의 수명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구나라는 생각까지.
그분의 죽음소식에 모두 동요하던 동료들도 시간이 지나니 잦아들고 잊힐 때쯤 갑자기 내가 든 보험이 생각이 났다.
70세부터 죽을 때까지 탈 수 있는 연금보험. 길어진 수명을 대비하고자 든 보험인데 돌아가신 분은 향년 68세였다.
그러고 보니 국민연금도 얼마 못 타고 돌아가셨네.
새로이 설정한 향후 10년 직장생활의 목푯값이 또다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