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대략 7시 전후로 온다. 중간에 길이 막히거나 타는 사람이 많으면 그보다 일이 분 빨리 오거나 늦기도 하지만 거의 7시에 온다.
우리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6~7분.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거나 건널목 신호등에 걸리면 이보다 1~2분 더 늦는다.
내가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신호등에서 결정 난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면 걸어가다가도 냅다 뛰어서 빨간 불로 바뀌기 전까지 건널목을 건너야 하고, 만약 너무 길 건너기 늦었다면 다음 신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이때 눈치 없이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쌩~하고 가버린다면, 난 버스를 못 타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 일이었다.
집에서 늦지 않게 나온 나는 제법 빠른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내가 타는 버스는 길 맞은편에 있으므로 늘 걸으면서도 건널목 신호등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멀찌감치 떨어진 건널목의 신호등이 바뀌지 않은가.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마자 출근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난 마구 뛰어가서라도 건넜어야 했다.
하지만 난 뛰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핸드폰 시계를 흘끗 보고는, 괜찮아. 아직 56분밖에 되지 않았잖아. 차가 오기 전까지 신호가 또 한 번 바뀔 거야라고 생각하며 건너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늦게 올 줄 알았던 버스가 바로 코앞까지 왔고, 난 조바심이 났다. 제발 신호등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 사이 직장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빨간 불임에도 불구하고 차가 없는 사이를 노려 마구 뛰어갔다. 그 남자를 따라 뛰어갔어야 하는 건데, 난 뛰지 않았다.
결국, 버스는 그 남자만 싣고 가버렸다.
결과적으로 내가 타야 할 버스는 가버렸고, 난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20분이나 더 기다려서 다음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 결과 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제시간에 갈 수 있을까 초조해했으며, 무거운 가방을 지고 너무 빨리 걸은 나머지 아킬레스건염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며칠이 흘렀다.
데자뷔처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멀찍이 떨어진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길을 건넜고, 난 길을 건너지 못했다. 심지어 빨간 불인데도 불구하고 한가한 틈을 타서 빨리 뛸 수도 있었지만 뛰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난 버스를 놓쳤고 20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첫 번째 버스를 놓쳤을 때 들었던 기분은 단순한 자책이었다.
'너도 그 남자를 따라 뛰었으면 됐잖아. 그땐 차도 한 대 안 왔었다고. 왜 뛰질 못 하니.'
신호등 불이 깜빡일 때 뛰었더라면, 아니 한 남자가 빨간 신호를 무시한 채 뛸 때 같이 뛰었더라면 난 버스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버스를 놓쳤을 땐 자책과 더불어 깨달음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삶도 비슷하게 흘러온 게 아닐까? 면접에서 아주 사소한 실수 때문에 떨어진다든가, 공모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떨어진다든가 하지 않았을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들 뛸 때 뒤늦게라도 헐레벌떡 뛰었더라면 좀 더 인생의 기회가 많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깨달음은 도전이었다.
난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리고 놓친 버스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며 '괜찮아. 다음 버스를 타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버스를 놓쳤기 때문에 20분이란 시간을 다리 아프게 기다려야만 했다.
기회도 마찬가지다. 한 번 기회를 놓치면, 그 기회를 다시 잡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어쩌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 번 내게 온 버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난 앞으로 버스를 놓치지 않을 거다. 신호등 불이 아슬아슬하게 깜빡여도 부리나케 달려갈 것이며, 설령 중간에 신호를 어기더라도 기어코 버스를 탈 것이다.
내 인생에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