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원래 아주 어릴 적부터 열등감을 갖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거나 아님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가지고 싶은 물건이나 재능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을 내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그 순간, 열등감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거든.
이 열등감의 씨앗이 싹이 트고 뿌리내리며 자라기에, 욕망의 집약체인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비옥한 토양인 줄 아니? 영양소만 가득 있을 뿐 천적이나 해충은 없어.
하지만 자신의 질투심과 욕심, 허영 따위가 싫다고 해서 뿌리부터 뽑아 버리려 너 자신을 너무 학대해서는 안돼.
어떤 존재가 싫다고 해서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지구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는 생각과 행동이야. 아주 폭력적이고 위험한 발상이지.
인간의 역사를 보면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잖아. 인류의 역사란 곧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말이야. 이렇게 인간의 폭력성은 역사가 깊고, 그 내면을 넘어 유전학적으로도 생존에 유리한 기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네가 이 분노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란 건 애초에 없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기술은 DNA로 전달받는 유전 형질 중 하나이니까, 다시 말해 인격이나 됨됨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디폴트 값이니까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그 자책 자체가 너의 비폭력성을 반증하기는 하지만, 욕망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칸트의 마음으로 수용하고 사는 것이 좋겠지. 중요한 건 평생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을 그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지가 더 중요하다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열등감과 욕망은 인간의 삶 전반에서 대부분은 긍정의 편에 서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니까 말이야. 물론 결과론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나는 말이야, 결핍이라는 간절함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설명하기 힘든 원천의 빛이 좋아. 눈의 깊은 곳에서 표출되는 영롱하고 푸르지만 서늘한 그 빛 말이야.
그래서 결핍이 있는 사람들보다 결핍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껴지더라고, 나는.
구석에 몰린 작은 생명체의 안광. 두렵거나 공격적인 눈빛. 아니, 분명 둘 다겠네. 두려움과 공격성이 공존하는, 눈앞의 적을 오롯이 마주하는 삶을 향한 태도와 그 에너지! 데카르트는 이 에너지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 두려움 속에서 빛나는 맹수들의 그 눈빛. 행성의 중력처럼 깊은 곳까지 빨아들이는 포식자의 맹렬함을 경험하고도 '영혼이 없는 기계'라고 감히 말을 할 순 없었을 거야. 동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명의 부제로 치부해 버렸겠지.
생명의 존엄성, 그 숭고함을 향한 경외.
행복을 향한 갈망.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행복은 지속성을 갖고 있지 않아. 순간적인 찰나의 감정이,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동안 연속적으로 마음에 입력되는 것일 뿐.
하지만 사실은 말이야, 인생의 대부분은 불행한 시간이야. 여기서 잠깐 불행에 대한 오해를 먼저 해소해야 되는데, 불행이란, 말 그대로 행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얘기하는 거야. 그저 행복의 상태가 아님을 뜻할 뿐인 불행이란 이 단어가,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의 집착과 표독스러움으로 인해 지옥 같은 나날을 의미하도록 입장을 변질당했어. 행복과 불행은 그저 행복을 느끼는 상태와 행복을 느끼지 않는 상태, 그 이상의 해석은 필요하지 않아. 곱씹을수록 각자의 확증편향만 힘이 커질 뿐이지. 그래서 인생의 대부분은 불행한 시간이라는 말도 이 의미를 생각하고 한 말이야.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행복과 비교하며 우울감이나 좌절을 느끼는데, 사실 시작부터가 잘못된 결과도출이 뻔한 비뚤어진 비교인 거야.
난 비교자체를 측정의 의미에서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올바르게 비교하려면 자신의 불행과 타인의 불행을 비교해야지. 그게 맞지 않아?
예를 들어, 어떤 이성이 나와 다른 남자, 혹은 다른 여자를 놓고 누가 더 매력적인지 상대평가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의 단점과 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비교하며 평가한다면 아무래도 억울하지 않을까? 어떻게 내가 상대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어? 잘못된 결과도출이 뻔한 오류적 풀이과정인 거지.
우리, 물론 지금 현실과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결과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우리 지금 상황에 맞는 옳은 질문을 해보자는 거야. 지금처럼 하늘을, 혹은 발 끝을 보거나 아니면 허공의 어느 한 점을 초점 없이 멍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타인이 되어 대 여섯 발자국 떨어진 채 관찰자로서 너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의 어두운 향의 마음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너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군중에 속했을 때 느껴지는 무질서적 혼돈에서 벗어나 건물로 올라와서 그 군중을 내려다볼 때 보이는 그 완벽한 질서처럼 말이야. 명화도 한 곳만 가까이서 노려보면 혼란스럽기 마련이잖아. 적정한 거리에서 전체를 봐야 어떤 주제의 그림인지 알 수 있듯이. 그게 밝은 주제이던 무서운 주제이던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얘기야. 영화의 액션 씬에서 주인공이 십 수명의 악당들과 싸우면서 최종보스를 향해 가는데, 좀 전에 죽었던 조무래기 남자의 처자식이나 개인사를 걱정하면 영화 전체의 주제가 마음에 와닿겠냐고.
순간들이 쌓여 삶을 이루는 건 맞지만 더 큰 안목으로 사는 찰나와 지나간 찰나들을 후회하며 보내는 찰나의 향기는 너무도 다를 거야.
근데, 너 질문이 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