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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룡 Jul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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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와의 첫 만남 2

범석은 한 발씩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에 작은 싱크대와 처음 보는 브랜드의 오븐형 에어 프라이어가 있고,  2구짜리 인덕션, 그 밑에는 입을 살짝 벌린 작은 드럼 세탁기, 벽 쪽의 위아래로는 아담한 크기의 양문 개방형 수납장. 주방은 그게 전부였다. 왼쪽의 주방 맞은편으로는 20대 여성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규모의 다섯 층으로 된 신발장(한 칸에 두 켤레씩 구겨 넣어져 있었고 맨 위칸은 스니커즈를 쌓아두었다)이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범석으로서는 옆으로 돌아서 봐야 전신을 볼 수 있을 것 같이 얇은 전신 거울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짧은 복도를 두세 걸음 가니 오른쪽 가슴께에 전등 스위치가 보여 둘 다 켰다. 번쩍하고 밝아진 방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본 후 범석은 비로소 자신이 홀로 자취하는 여자의 방에 와 있음을 자각했다. 범석의 기억 속 20대 여자의 방에 대한 경험적 자료는 대부분이 사건 현장이었고(대학교 때 두어 달가량 사귄 여자친구의 자취방이 그의 유일한 사적인 기억이다), 잘은 모르지만 범석은 실종자 김유선 씨의 방이 이렇다 할 특색이나 키치함이 없이 비교적 평범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싱글 침대에는 핑크색 베개와 바디 필로우로 보이는 기다란 네이비색 줄무늬 쿠션이 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스투키 화분과 미니 가습기가 있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는 옷이 빽빽하게 걸린 고정 파이프 행거가 2단으로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3단 책장 일체형 책상 위에는 흰색 노트북이 화면이 덮어진 채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집 안 어디에도 그 흔한 사진 한 장이 붙어있지 않았다. 시선이 책장으로 향했을 때 범석은 꽂혀있는 십 수권의 책들 제목에 눈길이 멈췄다.

'<우울할 권리>, <혼자 훌쩍 떠나는 우울여행>, <우울할 때 함께 할 책>, <우울에 특효약 디저트들>. 뭐 죄다 우울에 관련된 책이잖아. 김유선 씨는 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던 거야. 이틀 이상 연락이 안 되는 지금, 많이 위험하다. 그녀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된다!'

범석은 불편한 기시감 같은 직감을 느꼈다. 평소 '모든 사건의 가장 큰 동기는 탐욕이다'라는 직업병적 소명으로 현장에 임하는 범석으로서는 김유선 씨의 행적들이 큰 동기들을 보이지 않아 묘연하게만 느껴졌다.

책상 위 연식이 오래되어 뻑뻑해진 김유선 씨의 노트북을 열었다. 전원을 켜고 잠시 기다리니 비밀번호 입력 창이 떴다. 범석은 밖으로 얼른 나가서 김유선 씨 부모님에게 그녀의 생년월일, 휴대폰 번호 뒷자리, 이메일 주소 등을 물어 적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입력해 보았지만 모두 오답이었다. 경찰서로 가져가려고 화면을 닫으려다, 수많은 비밀번호를 사용하며 사는 현대인들의 보편적 습관처럼 범석은 숫자 '0' 네 개를 입력하고 앤터를 눌렀다.

비밀번호가 풀리면서 방 안의 정적에 산뜻한 시작음이 속삭이듯 퍼졌다. 범석은 몸에 힘이 살짝 풀리면서 허탈함에 헛웃음이 났다.

'20대 여성의 노트북 비밀번호가 0네개라니. 참. 이럴 거면 비밀번호는 왜 걸어놨냐.'

평소 루틴대로 범석은 최근 검색 기록부터 살폈다. 우울증 극복에 관련된 블로그 출입 기록들, 서적 검색 기록들(이 역시 우울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 사이에 눈에 띄는 기록이 보였다.

'액체질소 구매방법, 액체질소 가격? 액체질소 개인구매. 뭐야 이건. 액체질소를 사려고 했나? 어디에 쓰려고 액체질소를 구매하려고 한 걸까.'

전자메일을 들어가 보니 제일 최근 받은 메일이 처음 보는 이름의 회사에서 결제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주는 메일이었고 그 날짜가 바로 이틀 전, 그러니까 김유선 씨가 연락이 두절되기 시작한 날이었다.

범석은 메일을 들어가 보았다.

'사이언스 에듀? 아, 과학교재 회사네. 액체질소 20L가 19만 원 정도 하는구나. 비싼 거야, 싼 거야? 당일배송? 그럼 이틀 전에 김유선 씨는 액체질소를 배송받았다는 말인데.'

범석은 일어나서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배송받은 액체질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범석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범석의 소속인 강력 2팀의 후배형사였다.

"어. 말해."

"장 팀장님, 팀장님 말씀대로 김유선 씨 휴대전화가 꺼진 위치에서 주변 3km를 수색해서 10분 전에 김유선 씨 찾았습니다."

"그래? 어디야? 상태는? 아, 아니다. 나 지금 김유선 씨 부모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좀 바꿔줘 봐."

"아 팀장님 그게, 김유선 씨 차량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아무래도 자살인 거 같습니다."

"...... 뭐?"

김유선 씨의 방에서 급하게 나가려던 범석은 두 다리가 갯벌에 빠진 듯 멈춰 선 채로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범석은 일단 김유선 씨의 노트북을 챙긴 후 후배 형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주소 문자로 찍어."

범석은 밖에서 기다리던 김유선 씨의 양 부모님과 건물주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뛰듯이 차에 올라탔다.

후배의 문자를 보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48km.

범석은 출발했다. 자신이 미노타우로스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점점 속도를 높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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