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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울, 결국 나는 또 떠났다

같은 지붕 아래, 다시 시작된 엄마와 딸의 시간

by 하진

폭풍 같았던 출국 끝에, 결국 나는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두가 ‘곧 끝날 거야’라고 말하던 전염병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 곁에 머물렀고,

그 사이 내 삶은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졸업만 하면 미국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암스테르담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볼까.

행복한 고민만 하던 내게, "지금은 그럴 수 없어"라는 현실이 도착했다.

갑자기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나는 그대로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서,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호텔학교에 간 이유는 분명했다.

전 세계 멋진 호텔을 누비며 여자 총지배인이 되는 것.
그런데 팬데믹으로 호텔업계가 무너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

내 마음도 함께 내려앉았다.


그렇게 예상과 다른 길로 접어든 나는,

우연처럼 부동산 업계에 발을 들였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낯선 용어들, 처음 듣는 회사 이름, 그리고 본격적인 한국식 사회생활.

동기들과의 회식, 소개팅, 끝없는 만남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한국의 20대 후반'처럼 살았다.

약 7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나는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엄마는 성찬식 와인 한 모금에도 종일 앓았고,

아빠도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졌다.


우리 집은 알코올 유전자가 없다는 걸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했다. 술도, 위험도.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늘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달랐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시는 소맥, 회식자리의 유쾌한 농담들, 그리고 처음 해본 소개팅.
‘내가 지금 한국에서 사는구나’ 하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그러다 보니, 늘 9시면 도착하던 엄마의 카톡은 무심하게 넘기게 되었고,
새벽 두세 시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불 꺼진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도 점점 익숙해졌다.


내가 지금 한국에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신 거지?
혼자 투덜거리며 방에 들어가던 그 밤들.

엄마는 그저 말없이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무심코 지나쳤다.


출퇴근 시간은 아깝고, 엄마의 잔소리는 여전하고,
서울에서 살고 싶은 욕심까지 겹치면서 나는 자취를 원했다.

이유는 복잡했지만, 결국엔 내 고집이었다.

그래서 2년의 설득 아닌 설득 끝에,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7년을 혼자 돌아다니며 살아온 나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7년 만에 돌아온 딸과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구나 하고 기뻐했던 엄마의 마음은,
그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같이 살면 안 되겠니?


조심스레 건네던 엄마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이삿짐을 쌌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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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시선


드디어 내 품으로 돌아온 딸은 훌쩍 자라 있었다.
스스로 취업 준비를 하고, 좋은 회사에 빠르게 들어간 아이.
항상 자기 몫을 해내는 딸이지만, 나는 늘 불안했다. 그게 엄마다.


밤늦게야 집에 들어오는 딸,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붉고 텅 빈 눈빛으로 현관문을 열던 날들.

"지금 누구랑 있었던 거지?"
"언제 들어오는 거야?"

물어보고 싶지만, 참고 또 참는다.


나는 그저 불 꺼진 거실에서 조용히 딸을 기다렸다.
괜히 대화를 건네봤자 짜증만 날 테니까.
대신, 딸이 들어오면 안심한 듯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몇 번이나 카톡을 길게 쓰다 지우고,
“그냥 나가서 살아라”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했다.


딸과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산다는 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시절, 딸은 어른이 되었고
나도 조용히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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