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나에게 -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은 끝났다
추석 연휴 전 주에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 둘째예요."
"어, 그랴."
"추석 전날 저 사람 근무 있어서 저희는 저녁에나 내려갈 것 같아요. 차례에 쓸 전은 제가 아는 반찬가게에 예약해 뒀어요. 추석 전날 찾아서 가지고 갈게요. 어머님은 다른 것만 준비해 주세요."
"그려? 잘했네. 너무 많이 사지말고 상에 올릴 만큼만 허지."
"네. 안 그래도 날이 너무 더워서 조금씩만 했어요. 그때뵈요. 어머님."
아 이 얼마나 자연스럽다 못해 매끄러운 며느리와 시어머님과의 통화인가. 누가 들으면 올바른 고부관계의 교과서 같은 대화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를 할 수 있기까지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시집살이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이라 했던가. 시집살이를 한건 아니지만 그 삼년이라는 시간이 참으로 적절한 숫자임을 실감한 며느리로서는 무한공감의 박수를 쳐주고 싶다.
철없는 며느리, 시금치 나라에 입성하다
2005년 6월의 어느 날, 앨리스는 '결혼'이라는 굴을 통해, 그동안 주변에서 말로만 들어왔던 시금치 나라에 가게 된다. 그곳에는 '아들'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여왕님이 계셨고, '제사를 지내라!' 외치는 고집불통 왕이 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모르는 사이에 시금치 나라에 입성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이하는 명절에 시댁에 갔을 때 내 느낌이 딱 그랬다. 꽤 자유로운 분위기의 우리 집과는 달리, 종손이신 아버님에 덩달아 종부가 되신 어머님, 첩첩산중 시 할머님까지. 콩깍지가 한 꺼풀 벗겨진 눈에 펼쳐진 신세계에 둘째 며느리로 입성한 앨리스는 본능적으로 정신줄을 똑바로 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과는 사뭇 다르게 웃음기 쫙 빠진 시댁 공기 자체에 압도당한 데다, 손이 크기로는 동네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우신 어머님이 봐 두신 장보기의 양은 초보 며느리의 소박한 예상 따윈 물거품이 되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 공장을 방불케 하는 꼬지와 동그랑땡의 기름칠과 계란옷 입히기의 향연, 런어웨이를 연상시키는 늘어선 오방색의 음식들이 줄을 설수록, 짙은 기름내는 섬유 속 한 올 한 올까지 스며들어 내가 기름인지 기름이 나인지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게 해 주셨다.
갓 시집 온 둘째 며느리에게 꽃단장은 사치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며 버텨보기에 나는 그리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4년 전 시할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참 무던히 일했다. 어머님은 제사도 많이 안 지내본 어린 며느리가 생각보다 똘똘하니 일을 잘 한다며 "기술자"라는 특유의 호칭까지 하사하셨지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명절에나 겨우 모이는 식구들끼리 오손도손 얘길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는 못할지언정 짜증과 피곤이 목까지 차오르면서까지 하루 종일 음식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내 안의 질문들은 언젠가 한 번은 '며느리의 난'을 일으키리라는 작정을 하게 했다.
포기하지 않고 이해시키겠다
나보다 2년 먼저 결혼하신 형님은 동서지간의 대화 끝에 늘 "나는 포기했어. 몇십 년 넘게 사신 분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겠어. 그냥 그러려니, 일 년에 한두 번 그냥 넘기는 거지."라는 말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시부모님이 내 부모님과 확연히 다르신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냥 포기하고 순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골에 사시긴 해도 시부모님들도 방송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다 알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뿌리깊이 박힌 생각을 쉽게 바꾸는 것이 어려우실 뿐.
형님의 입장도 이해를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이 있을 땐 늘 침 튀기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시부모님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가끔은 시골분들이라 얘기가 안 통할 거라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어쩌면 그분들을 무시하고 대화를 단절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뭐 나는 눈치 볼 것도 없고 말씀을 드려보는 거지 뭐. 아니면 말고.'
이런 생각 끝에 시 할머님이 돌아가신 다음 해에 전을 부치면서 어머님께 조심스레 여쭤봤다.
"어머님도 해마다 몇십 년 동안 이렇게 제사 음식 하시는 거 힘드시죠?"
"힘들지. 그래도 해야지. 조상님을 정성스레 섬겨야 너희들도 잘 살고 그러는 거지. 그래도 니들 있고부터는 훨씬 편하고 좋다."
"어머님, 할머님 계실 때는 어머님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만 저희도 손 많이 가는 꼬치나 동그랑땡 전 같은 거 내년부터 사서 할까요?"
"여자가 몇인데 그걸 뭐 사서해. 그냥 하지."
"형님도 일하시고, 저도 애가 어리고, 명절에 차 막히면서 오는 거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요. 다들 멀리 있어서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전 부치느라 힘들어서 제대로 얘기도 못하고 다음날은 제사 지내고 다들 집에 가기 바쁘고 재미없어요 어머님."
"그랴? 뭘 얼마나 열심히 놀라고?"
"형님, 아주버님이랑 맥주도 한잔씩 하면서 놀려고요. 헤헤헤."
겁 없는 둘째 며느리의 얘기를 한참 들으시던 어머님이
"이봐유. 얘들이 내년부터는 전 사서 하자는디유? 오랜만에 모이는데 일 좀 적게 하고 놀고 싶대유."
형님이랑 살짝 고개를 돌려 아버님 눈치를 살피는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던지."
예? 그냥 그렇게 쉽게 허락하시는 거였어요? 이렇게 쉽게 허락하실걸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이건 그동안 고생 한것에 대한 보상이다. 절대 쉽게 얻은게 아니다.
나 혼자 계획했던 '며느리의 난'은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끝이났고 전 부치는 기술자 둘째 며느리는 그 용한 기술을 내어놓는 대신 심심한 시금치 나라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고 있다.
대화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
'전의 전쟁' 은 어떻게 잘 해결됐지만 명절에 시댁에 가는 일은, 하고 나야 속이 시원한 숙제 같은 마음은 여전하다. 결혼 10년 차가 넘다 보니 남편도 나도 이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눈치껏 배려하는 사이가 됐지만, 어른들과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크게 좁혀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내 부모님들과도 생각이 다른데, 다른 시대, 지역, 환경에서 살아오신 시부모님들과 내 생각이 같을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이가 드셨다고, 시골에 계셔서 아무것도 모르신다고 그냥 무시하듯 대화 자체를 단절해 버리는 건 어쩌면 고부간의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분들은 정말 모르셔서 달라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달라지세요' 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달라지실 수 있어요'라는 마음가짐으로 대화를 시도한다면 조금은 승산이 있지 않을까. 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며느님들이 당당하지만 조금은 부드럽게 설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결혼하고 5년 정도까지 시금치의 '시' 자도 싫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물개 박수를 치고 있던 나다.
그래도 시금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상, 영원한 앨리스가 되더라도 마냥 혼자 상처받으며 퍼렇게 물든 마음을 안고 살고 싶지는 않기에 또 다른 변화를 위해 끊임없는 소통을 시도해 본다.
늘 내편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이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고마운 분들이 아닌가.
그리곤 어머님께 마음 속으로만 말씀 드린다.
'어머님 둘째 아들은 뼛속까지 제 편입니다.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