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마하면 포도, 그리고 낮잠

그제, 하늘이 뚫린 것처럼 밤새 비가 쏟아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마음에 얇게 스며들어 분위기에 젖게 한다. 비가 내리는 모양을 닮아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아 흔들거린다. 비가 만든 분위기가 내면으로 조용히 파고든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감상이고 뭐고 간에 눈을 부릅떠 비를 보게 하고 빗소리를 듣게 만든다. 비의 존재감이 사뭇 크다. 비가 감정을 이기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여름, 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맘 때, 어느 토요일 하교할 무렵이다.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다행히 우산은 있었다. 그러나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고 서글퍼졌다. 바쁜 엄마를 둔 나로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학교 앞 마중이었다.

반은 비에, 나머지 반은 땀에 젖어 무겁게 집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엄마가 있었다. 어떤 사정으로 일찍 퇴근했다고. "에이, 그럼 나 마중오지." 짧게 입을 삐죽하곤 이내 웃었다. 그래도 한낮에 엄마가 집에 있는게 좋아서. 혼자서 어두운 빈집에 있지 않아도 되니까. 그 때 TV에서는 '유머 일번지'가 나오고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으니 엄마가 들여온 스댕 그릇, 그 안에 검정색 포도 한 송이. 한 알씩 톡 깨물어 즙을 삼키고 씨를 뱉어내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텔레비전 소리, 빗소리가 '잘자라 우리 아기' 자장가 같아 한잠을 잘 잤다. 내가 좋아하는 포도, 유머 일번지 그리고 엄마가 있으니까 굵은 빗소리도 편안하게 들렸나보다.

그래서 나는 장마하면 포도, 그리고 낮잠.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