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잘 관리된 15,900원짜리 의자가 인간의 생보다 영원할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지고한 탐구와 요구되는 탐색의 순간들은 지폐로 환산될 수조차 없는 무가치에 가깝게 평가받을 수 있고, 그마저 인간의 시점에서만 높고 낮음의 개념을 갖는다.
우리는 복잡하고 섬세하게 합쳐진 단지 잠깐 동안의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와 조직들의 집합체다. 한 번 호되게 충돌하거나 추락하기만 하면 간단히 다시 무생물이 된다. 진지하게 세운 계획들은 망가지기 무척 쉬운 작은 모세혈관들의 그물에 의해 유지되며, 작은 고장에도 원대한 계획과 깨달음은 그 즉시 소멸한다.
그러한 세계관에서 개인의 요구가 간단히 함락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시간이 가지는 유한성 혹은 무한성의 각기 다른 성질 속에서 인간의 염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어느순간 가벼이 증발한다. 나약하게 태어나 불안에 떠는 인간은 하늘로 날아가고 싶다는 종류의 욕구를 시간을 낭비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소모하는데 익숙하다.
세계의 존재방식도 민주주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내심 둘러싼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에 불과하고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가히 데카르트적인 생각에 투표권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급진적인 충동도 아니고 거듭된 고민의 끝단에 위치한 허무주의도 아니다. 홀로의 외로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자아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자아의 첨예한 충돌이 빚는 모순, 그 모순에 가장 어울리는 대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한 바람이다.
민달팽이는 몸 전체가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번쩍 들어 가로등에 비추면 내밀한 모습이 속속들이 보인다. 적어도 우리 몸에 한해서는 손가락 끝에라야 반투명한 세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솔직함에 관해서는 민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사람인 것 같다. 미물을 천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인간은 스스로가 미물임을 인정하며 애써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실존을 둘러싼 진실들에 대해 담론들을 제기하고 제멋대로 고민에 빠진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가장 나약하기 때문에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새끼 가젤과 콜로세움에 단둘이 놓여지지 않는 한 언제나처럼 계속 그러한 주장에서 나약이라는 전제를 제거한 채 우쭐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만과 방자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인간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꼬물꼬물 기어가는 민달팽이를 보고 저들은 집 걱정을 하지 않아 좋겠다는 등의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달팽이에서 유일하게 남은 집마저 헌납한 그들이란 얼마나 욕심 없이 무구한 생물인가! 그저 기어가며 식물잎을 쪼개먹고 지나간 자리에 점액질을 흘릴뿐인 민달팽이의 삶을 어찌 인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연 속에서의 생각은 항상 스스로를 세상 가장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니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