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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부대

단편 추리소설 <레닌그라드 1942년, 소시지>

by 장웅진




‘형벌부대’란 말 그대로 죄수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전선의 군인들마저 굶주리기 일쑤인 상황인데 죄수들을 감옥에 처넣고 공짜밥 먹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하는 일이라곤 지뢰밭에서 걸어 다니기, 총알받이, 폭격기의 후방기관총 사수처럼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임무들이다.

그러니까 ‘너의 쓰레기 같은 목숨을 조국에 바쳐 속죄하라!’가 모토인 부대랄까.


지금 모스크바의 육군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올가를 떠올리며, 영영 못 만나거나 혹은 영웅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거리로 나왔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내가 레닌그라드에 올 때 처음 만났던 레닌그라드의 시민이자, 함께 독일군 전투기를 격추한 전우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파노프 병장이 함께했다.

알렉세이는 나도 참가했던 레닌그라드 외곽 전투에서 수류탄과 기관단총만 들고 돌격해 적 전차 한 대를 부수고 전사한 바냐 노인의 아들이다.

그 바냐 노인은 러일전쟁 때도 10월 혁명 때도 내 장인어른의 부하였다. 그래서 내가 이 노란머리 거인과 죽이 잘 맞을 거라고 시티코프 소령은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세이가 심문실에서 ‘사람고기 소시지를 가지고 있던 노인’에게 해댄 짓을 보면, 소령에겐 아마 다른 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그 영감탱이는 재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쟁 전에도 소시지 구경은 힘들었을 자더군요. 그러니 쥐고기나 고양이고기로 만든 소시지겠지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물론 어디다 그 고기를 채워 넣을까요? 쥐나 고양이의 창자는 어림없죠! 결국 답은 나오지만 굶주린 놈이 그런 것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겠죠.”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그 노인을 그렇게 대한단 말인가?”


내 책망에 알렉세이가 나의 1.5배나 되는 몸을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내일까지 단서를 못 찾으면 저와 동지가 저 사령부의 높으신 분들과 형벌부대에 소속되어 지뢰밭을 걸어야 하니까요. 저는 말이죠, 높으신 분들이 싫습니다. 당원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히 그놈들과 함께 나쁜 일에 휘말리는 건 더더욱 싫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사님도 별로 반갑지는 않아요. 다만 하사님이….”


알렉세이는 사령부 건물인 스몰니 학원(Смольный институт)을 쳐다봤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크림색 정면을 갖춘 거대한 저택 같은 그 3층 건물은, 혁명 전에는 귀족 아씨들이 신부 수업을 받던 학교였다고 한다.

혁명 직후에는 레닌이 사무실로 썼으며, 혁명 정부가 모스크바로 이전한 뒤에는 레닌그라드 지역 공산당이 줄곧 사용한 건물이었다.


올가와 마찬가지로 혁명가의 자식인 알렉세이도 만감이 교차했을까?

제국 귀족이 공산당 간부들로 교체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혁명 이후 장인어른이 느끼셨다는 그 자괴감과 절망감에 알렉세이도 빠져있는 건가?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눈 뜨게 해준 여인의 남편이라 는 점 때문에….”


이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알렉세이의 생각을 짐작했다.

스탈린 동지가 소련에 귀순한 조선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올가를 ‘하사했다’라고 생각하는 거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헌데…, 하사님은 어쩌다 올가 누님의 남편이 된 겁니까? 전 올가 누님이 간호장교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고위급 장교나 당 간부의 아내가 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 데 말이죠….”


더 말하려다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알렉세이의 목에 걸린 듯했다.

화제를 돌리려는 건지 알렉세이는 대뜸 옷을 뒤져 담배를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윗분들이 던져준 미제 럭키스트라이크 담배 한 갑을 주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던 그에게 내가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조선인이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말이야. 그 조선의 부산이라는, 가장 큰 항구도시에서 근근이 먹고 살던 작은 옷감 가게 주인 부부가 내 부모님이셨지.”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하늘을 쳐다봤다.

YAK-1인 듯한 전투기 두 대가 고도를 달리하여 순찰 비행을 하고 있었다. 독일군 폭격기들이 도시와 시민들에게 주는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한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 전투기들을 올려다 보고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어렸을 때 비행기를 보고서 기계에 관심을 가졌어. 그래서 집을 나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자동차 정비소에서 도제 일부터 시작했지. 그럭저럭 기술도 배우고 돈도 모았을 때, 그 양반이 군대 시절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거야. 나도 함께 망했지.”


너무나 어리석었던 내가 떠올라 잠깐 이가 갈렸다. 그래도 입술을 꼭 여며서 그걸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 돈을 은행이 아니라 그 양반에게 맡겼거든. 그래서 그 양반이 미안한 마음에…, 그러니까 미안한 마음에 말이야…, 일본군 정비병으로 입대하도록 도와준 거야.”


그쯤에서 알렉세이가 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내게 주었다.

나는 담배를 빨면서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운명 덕에 사고가 나서 내가 정비한 전차가 박살나고 승무원들이 사망했지. 그래서 난 보병 부대로 전출됐고, 노몬한 전쟁까지 끌려간 거야. 물론 주코프 원수께 된통 당하고 포로가 되었지.”


그때 알렉세이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고 느꼈다.

나는 시비를 걸려던 마음을 애써 짓누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소련 인민으로서의, 소련 공산당 당원으로서의 길을 가게 한 건 주코프 원수가 아니라 지금의 내 아내 올가 이바노브나 마카로바 소위였다네.”


“이해가 갑니다, 하사님.”


알렉세이가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으며 덧붙였다.


“남자로서 제구실을 하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그녀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죠.”


“그런데 거기로 가면 단서가 나올까?”


“일단 거기부터 착수해야죠. 그 노인네는 처음 샀다지만, 이전에도 여러 번 사먹은 거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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