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시대를 연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1912년 3월 23일 독일 동쪽 포젠 시(현 폴란드의 포즈난 시)의 귀족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폰 브라운은 어머니로부터 천체망원경을 선물받은 뒤부터 우주 개척의 꿈을 키웠다.
1925년 당시 로켓 연구자인 헤르만 오베르트 박사가 출간한 [로켓으로 우주 여행하기(Die Rakete zu den Planetenräumen)]를 읽은 폰 브라운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 베를린 공대에 입학한 폰 브라운은, ‘우주여행협회(VfR)’에도 가입했다.
이 클럽과 오베르트는 독일 영화계의 거장인 프리츠 랑 감독이 [메트로폴리스](1927년작)에 이은 또 하나의 SF 대작 영화 [달의 여인](1929년작)을 제작할 때 로켓 관련 자문을 맡았다.
메트로폴리스
달의 여인 https://m.imdb.com/title/tt0019901/
폰 브라운은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 우주로 날아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구했다.
바로 이때 육군 병기국 로켓 담당 부장인 발터 도른베르거 대위의 주선으로 발트 해 연안 마을인 페네뮨데의 로켓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바로 이 ‘20세기의 파우스트 박사’는 역사상 최초의 탄도 미사일이자 나치 독일군의 최종병기인 V-2를 개발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후 대포 제작과 관련해 많은 규제를 받았다. 하지만 조준하거나 다루기가 까다로워 무기로는 잘 쓰이지 않던 로켓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
1933년, 비행기 회사인 ‘피제라’도 히틀러의 명령으로 재무장을 시작한 독일군에 펄스제트(pulse-jet) 엔진을 사용하는 로켓을 제의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독일군은, 1940년의 영국 대폭격이 막대한 피해를 내고 끝나자 피제라에 그 로켓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1942년부터 독일이 폭격 당하자, 히틀러는 ‘보복 병기(Vergeltungswaffen) 제1호'라는 뜻인 ’V-1'이라는 이름을 피제라의 로켓에 붙였다.
역사상 최초의 순항 미사일인 V-1은 850킬로그램짜리 탄두를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시속 600킬로미터에 불과해 당시 연합군 전투기에 격추당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적이 감히 격추할 생각조차 못할 무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보복 병기 제2호'인 V-2의 제작 지시가 폰 브라운의 로켓 연구 팀에 할당되었다.
V-2는 폭약 1톤을 탄두에 장착하고 320킬로미터 떨어진 표적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고도 88킬로미터(대기권 중 마지막 층인 열권의 초반 부분)까지 치솟은 뒤 시속 0.8킬로미터로 목표에 떨어졌다.
연합군에는 이런 V-2를 격추시킬 수단이 없었다.
히틀러는 “이로써 영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면서 좋아했다.
수차례의 시험 발사 후 1944년 9월 8일에야 연합군이 해방시킨 파리를 향해 1기가, 영국 런던을 향해 2기가 발사될 수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런던을 향한 본격적인 V-2 미사일 공격이 시작되었다.
V-2 미사일이 런던에 명중했다는 소식을 들은 폰 브라운은 자신의 발명품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로켓은 완벽하게 발사되었다는군. 그러나 엉뚱한 별에 떨어졌다네!”라며 탄식하는 데 그쳤다.
나치스의 박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V-2 미사일은 이렇듯 무시무시한 성능 때문에 연합국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미국은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라는 독일 과학자·기술자 포섭 계획까지 세우고 독일이 패망하자마자 폰 브라운 등을 미국으로 모셔왔다.
폰 브라운은 새로운 조국의 요청에 따라 핵폭탄을 장착할 수 있는 PGM-11 레드스톤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다. 이 미사일은 미국제 탄도 미사일들의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