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여인 전혜린
1965년 1월 8일 금요일. 1월이라 그럴 것이다. 초저녁인데도 명동의 골목길은 이미 어둠이 가득 찼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명동은 어둠이 찾아와야 생기가 돈다. 그래야 제 맛인 것이다. 어둠을 틈 타 서울에서 글이나 좀 쓰고 그림깨나 그린다는 예술인들이 '은성'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은성'은 예술인들의 성지였다. 그러나 이날 '은성'의 풍경은 흥청거렸지만 분위기는 왠지 쓸쓸했다. 고양이만큼 크고 검은 눈동자의 여인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술집 분위기를 압도하면서 깊고 투명한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전혜린이다.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
다시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라
당신을 보기 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이런 '사의 찬미'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1965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때는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는' 지금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은성'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 이틀 전인 1월 6일. 전혜린은 남자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쟝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게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이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미치고 말아. 내속에 있는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 줘'
'은성'에서 자작시를 낭송한 다음날 9일 토요일. 전혜린은 친구 이덕희를 만나 귓속말로 '덕희야, 세코날 40정 구했어. 흰 걸로 "라고 말했다. 잔뜩 취한 그녀는 코니 프란시스의 'beautiful brown eyes'를 흥얼거리며 귀가했다고 한다. 그녀가 정말 죽으려고 수면제를 복용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31세. 대학교수. 이혼녀. 수면제. 죽음. 천재. 번역가 겸 수필가.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래서 전혜린은 신화가 된다. 여기에 불을 붙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이다. 한국일보가 사망 1주일인 17일 박스기사로 그녀를 조명했다.
'신춘(新春)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자요, 독일문학가인 전혜린(31) 씨의 죽음이다. 지난 12일 간소하나마 장중한 장례식이 시내 남학동 25번지 전혜린 씨 친정집에서 치러졌다. (중략)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에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수면제(세코날) 과용으로 인한 사고다. 과도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 자살일지도 모른다.. 등등. 커피 15잔을 마셔야 비로소 평상인과 같아질 만큼 심장이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사망 전날 폭음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가정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상을 현실에 적응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늘 비관하고 있었거든요” 친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술회하며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사회면 1단기사로 취급되던 그녀의 죽음이 이처럼 언론에 의해 또다른 면이 재조명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듬해 뮌헨 생활과 딸 정화를 위해 쓴 '육아일기'를 한 데 묶은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출간되면서 전혜린 이름 앞에 '불꽃의 여인'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전혜린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당대 최고의 문필가 이어령이 이 책의 말미에 추모글을 올리며 열기에 힘을 더했다.
'그는 활화산이었다. 이 지상에 살고 간 서른두 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살고 간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여자였다. 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에 있었다.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그가 도달한 침묵의 값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4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무려 수만권이 팔리는 등 '전혜린 신드롬'이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하인리히 뵐의 작품에서 따온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젊은 엄마들 사이에 '육아일기' 쓰는 열풍이 불었다. 그해 8월 여학생 2명이 전혜린을 언급하며 동반 자살을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회적 현상으로 번졌다. 이와함께 그녀가 번역했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등이 불티나게 팔리며 때아닌 독서열풍이 불었다.
전혜린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전혜린의 죽음을 암울한 시대의 실존적 죽음으로 받아 들였다. 당시 젊은이로서 흔치 않은 독일로의 유학길, 결혼, 이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혜린이 겪어야 했던 희망과 절망, 슬픔을 자신들의 처지로 치환하면서 그들은 전혜린 이름 석자를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들이 지금 60,70대가 되었다.
사족- 사촌누님 두분이 계시다. 나와는 꽤 연배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졸업하는 날, 아홉살 위인 큰 누님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붉은 색으로 기억되는 포장지를 뜯으니 '데미안'이었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고, 중학교 졸업할 때 즈음 책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전혜린'의 존재를 알려준 다섯살 터울의 작은 누님은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