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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낙타 Dec 24. 2024

시나리오는 힘이 세다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어릴 때부터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그 꿈은 눈매가 푸르던 젊은 시절까지 계속됐다. 아니,지금도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꾼다. 영화광이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매주 일요일 영화관 순례를 다녔다. 화면을 가득 채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에 넋이 나갔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안정효 소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그 자체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것도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내가 만든 영화의 시나리오는 내손으로 쓰고 싶었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남들이 깜짝 놀랄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꽤 유명한 영화제작사 최종면접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면접에서 유명 영화배우 남편이기도 한 영화사 사장은 대뜸 "영화의 3대 요소가 뭔가"라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첫째는 시나리오 둘째도 시나리오 셋째도 시나리오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장은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예술영화를 만들겠다"라고 으쓱거렸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순간, 사장의 표정에서 실망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떨어졌구나. 사장은 장황하게 말했다. "흥행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야지. 흥행이 먼저고 예술은 다음일쎄". 나는 "흥행과 예술 모두 잡을 자신이 있다"라고 정정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다. 


 보통 영화의 3대 요소를 말할 때 연출, 편집, 촬영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무조건 '감독의 역량이 최고'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전혀 부정하지는 않지만 감독의 역량이 아무리 출중해도 시나리오가 형편없으면 '영화 잘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기 힘들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감독의 데뷔작을 보면 모두 자신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감독까지 했다. 그 후 많은 감독들이 데뷔작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데뷔작이 '가장 잘 만든 영화'가 된 것이다. 모두 시나리오의 부재 탓이다. 그래서 부리는 꼼수가 웹툰을 이용하거나  외국 소설을 가져다가 각색을 한다. 소위 일류감독이라고 하는 대부분 감독들이 그렇다.  


 한국영화사의 가장 뛰어났던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이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향년 84세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위암이었다고 한다. '선굵은 리얼리티(조희문 영화평론가)'를 추구했던 송길한이 한국영화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송길한의 부고를 듣고 만다라, 씨받이, 길소뜸, 짝코, 티켓의 순으로 5편의 영화를 봤다. '씨받이'와 '길소뜸'은 1.5배속으로 봤다. 앞의 세편은 다행히 OTT 웨이브에 있었고 정말 보고 싶었던 '짝코'와 '티켓'을 어디서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영화평론가 J와 통화를 하면서  유튜브에 무료로 올라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기뻤다. 이 모두 '한국영상자료원' 덕분이다. 이런 명작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짝코'와 '티켓'이 좋았다. 개봉당시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편집도 돋보였다. '짝코'에서의 김희라, '티켓'에서의 김지미의 표정 연기는 정말 압권이었다. 특히 '티켓'의 엔드씬은 한국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송길한은 초창기엔 주로 하이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루면서 그의 인생도, 임권택의 인생도, 한국영화의 인생도 모두 바뀌었다. '짝코'를 시작으로 '만다라''우상의 눈물''길소뜸''씨받이' '티켓' 등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모든 작품을 임권택이 감독을 맡았다. 80년부터 86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임권택과는 모두 13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이 시기의 모든 영화가 영화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특히 '길소뜸'은 '만다라'에 이어 베를린 영화제 본선까지 진출해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사족이지만, 길소뜸이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했을 때, 북한에 있던 신상옥은 '돌아오지 않는 밀사'로 영화제에 참석했다. 덕분에 영화제에 참석한 신상옥과 최은희와 베를린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 남북이산가족을 다룬 '길소뜸'의 소재와 절묘하게 들어맞은 셈이 됐다.


 송길한은 영화인 가족이다. 동생 송능한은 '넘버 3'의 시나리오를 직접쓰고 감독했으며, 얼마전 '패스트 라이브즈'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셀린 송 감독은 그의 조카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은 이번에도 송길한의 부음에 인색하기 짝이없다. '오징어게임 시즌2'에는 넘치는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시나리오 작가를 소홀히 대하는 것에 나는 분개한다. 우리 영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송길한 작가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한국영화계에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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