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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낙타 Jan 02. 2025

작은 거인 잠들다

피아니스트 한동일


 돌이켜보면 인생은 '인연'의 연속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이런 돌발성 사건들은 그때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보면 약속한 것처럼 아귀가 딱 딱 들어맞았다. 하나의 인연이 맺어지면 그로 인해 또 다른 인연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그런 식이다. 그게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말이다. 생각해보면 아! 그게 '운명'이었던 거다.


  클래식과의 인연도 내겐 그렇다. 클래식과의 친분은 보통 부모나 형제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에 심취한 친구들에게 "언제부터 음악을 들었어?"라고 물으면 대부분 "부모님이 좋아하셔서 자연스럽게 듣게 됐어" "누이가 클래식을 좋아했지"라고 말한다. 나는 좀 다르다. 언젠가 한번 언급했지만, kbs클래식 전문방송 93.1 메가헤르츠가 결정적인 동기였다. 우연히 로시니의 '윌리엄 텔'서곡을 들었다. 느리고, 빠르고. 아주 빠른 형식을 모두 갖춘 12분짜리 그 음악이 나를 클래식의 길로 인도했다. 


 나는 이런 방법을 썼다. 노트를 한 권 산다. 93.1 메가헤르츠를 들으며 작곡가와 곡명을 적는다. 지휘자와 교향악단도 반드시 적는다. 가령 베토벤 교향곡 5번도 지휘자와 연주단체가 늘 다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세이지 오자와가 연주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이 연주하는 뉴욕 필하모닉... 이런 식으로 모두 적는 거다. 3개월만 적다 보면 들었던 음악이 반복되어 나온다. 귀가 더 열리면 음반을 사게되고 관련 서적을 찾아 읽었다. 시간이 흐르니 음악이 귀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클래식과 친해졌다. 지금까지 수천 권을 책을 읽고 수천편의 영화를 보았으며 수천 명의 사람을 만났다. 모두 내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역할을 했지만 그래도, 클래식을 알게 된 게 더 큰 위안이 된다. 나이가 들기까지 음악이 그런 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블루투스가 보편화 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거인들의 소리를 들으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무때나 바흐를 모짜르트를 베토벤을 바그너를 말러를 소환할수 있게됐다. 


 덕분에 1세대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었다. 한동일 이름 앞에는 '신동''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41년 함흥시 일출동 82번지에서 태어나 네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를 빼앗기는 등 소련군의 횡포에 46년 가족 모두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때 상황을 한동일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피아노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강을 건너지 않았고, 도망치듯 피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를 로스케에게 빼앗긴 것도 따지고 보면 나쁜 '인연'이었을 것이다. 


 1950년 6.25를 겪은 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이는 뜻밖에도 주한 미 5 공군 새뮤얼 존슨 중장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허물어진 폐허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재능 있는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 그때 존슨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미국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1954년 일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그해 6월 1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13세. 미국에 도착한 소년 한동일은 뉴욕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을 처음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음악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줄리아드 스쿨에 들어간 한동일은 스승 로지나 레빈을 만난다. 레빈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한동일은 없었을 것이다. '운명'이었다. '향수병'으로 고생하던 어린 한동일을 스승은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다. 흐트러짐 없이 악보대로 기계처럼 건반을 치는 한동일에게 스승은 음악에 감정을 실어 연주해야 한다고 늘 주문했다. 덕분에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한동일은 훗날 한국언론(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레빈 선생과의 첫 '인연'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레슨 받았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나는 조금도 안 틀리게, 그저 완벽하게 치려고 했다. 쇼팽 곡인데 아주 엄격하게 쳤다. 선생님은 다정하게 ‘음 하나하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듯 음악의 톤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피아노를,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휴먼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완벽한 기계가 되려고 한 거 같다. 하지만 음악은 그게 아니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테크닉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본인의 노력과 스승의 가르침 덕분에 '영피플 콘테스트'에 입상하자 레빈 선생은 어린 소년을 카네기홀로 데려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 등 기라성 같은 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보여주었다. 훗날 한동일은 대가들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의 위대함과 무게'를 절실하게 느꼈다고 술회했다.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듣고 선생님에게 가서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직접 인사했다. 아라우는 4번을 통해 인생의 경험, 인생의 느낌, 그리고 내 심장을 움직였던 분이다.  에밀 길렐스가 연주한 리스트의 ‘소나타 B 마이너’를 통해 말'불이 뿜어져 나오는 산'을 보았다. 그렇게 배우고 느끼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연주를 듣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승승장구한 소년 한동일은 16세 때 미국 카네기홀에서 꿈에 그리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가졌다. 1962년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의 연주를 듣고 감격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19세의 한동일을 포옹하며 "진정한 인재"라며 감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65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레벤트리트(Leventritt)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해 ‘한국인 최초 해외 콩쿠르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성진, 임윤찬의 국제 콩쿠르 우승 뒤에는 한동일 같은 해외진출 1세대 피아니스트의 피나는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주 아주 오래전 지방 교향악단과 밴쿠버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협연자가 한동일이었다. 교향악단과 리허설이 끝난 후 둘이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쾌활했다. '작은 거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스턴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많은 이를 만났지만 그렇게 겸손한 음악가는 처음이었다. 줄리아드 동기였던 바이올리니스 이작 펄만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그저 평범했고 진짜 천재는 이작 펄만"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2025년 새해를 이틀 앞두고 홀연히 떠나갔다. 향년 83세. 아무리 생각해도 100세 시대에 너무 이른 나이다. 그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정명훈이 지휘하고 임윤찬이 협연하는 뮌헨 필하모닉의 연주로 들는다.  20세 신성(新星) 임윤찬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듣는 내내, 한동일이 5년만 더 건강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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