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세상을 적시는 이런 날이면 마음도 함께 젖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 마음의 온도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했다. 인연에 관한 글귀를 읽고 사색에 잠겨 있던 그때, 십여 년 전 이웃으로 정을 나누었던 두 분의 언니가 예고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건만 언니들은 더 환했고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다. 나를 향해 "더 젊어졌네"라며 건네는 다정한 덕담에, 그간의 고단함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라는 이름으로 묶인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다. 언니 중 한 분이 타고 온 새 차 이야기는 그 천륜이 어떻게 사랑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노모를 모시는 언니를 위해 형제들이 마음을 모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인연은 늘 같은 방향으로만 나를 데려가지는 않았다.
전업주부에서 늦깎이로 사회에 나와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어떤 이는 어처구니없는 언행으로 내 가슴에 울분과 멍을 남기고 지나갔다. 황당한 잘못 앞에서도 반성과 사과도 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태도로 그 상처는 가슴에 깊은 옹이로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나를 살린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 모든 것이 막혀 있던 시절, 나라는 사람 하나만을 믿고 선뜻 손을 내밀어준 이가 있었다. 조건 없이 내민 그 손은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세워주었다. 오늘 찾아온 언니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다. 부탁하지 않아도 곁에 와 주고 말없이 도와주던 인연들.
나는 주는 쪽에 더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해 왔지만 가만히 돌아보니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아픈 인연의 상처를 덮고도 남을 만큼 내 곁에는 늘 따뜻한 '인덕(人德)'이 머물러 있었다.
움켜쥐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짐이 아니라 힘이 되는 인연으로, 인연이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날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헤어지는 길, 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이 인연이 복이 되는 인연이어서 참 다행이라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의 뜰에는 벌써 파릇한 인연 하나가 조용히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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