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쓸모없는 비용 손실, 의회 업무보고와 행정사무감사
나는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정책의 정치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정책의 정치화'란 무엇인가. 누구 말대로 정책과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람들 눈에 썩 보여줄 만한 장면은 아니다. 정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때로 선출직 공무원의 공약으로부터, 혹은 더 높으신 분의 지도 편달에 의해서 한 두 마디가 쏟아진다. 물론 선출직의 바람은 다시 한번 선출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정책적 효용성보다는 유권자들의 눈에 띄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종류가 그 목적일 것이다. 실장, 국장, 과장, 팀장, 실무자, 그리고 더 아래로는 산하기관까지 내려가는 위계구조에서 높은 분의 한두 마디의 말은 다시 바닥에서 위로 구두와 서면 보고의 형태로 바뀌어 솟아오른다.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 이른바 현장의 목소리, 무수한 보고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든, 캐비닛에서 꺼내 이름만 바꾼 한 장 짜리 보고서든 앞에서 여러 번 말했듯 위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최초의 모습을 사라져 간다. 그 윗분들이 갖고 있는 나름의 경험치와 전문성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공공 분야에 계신 분들, 위계적 관료 조직에 계신 분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힘을 쓰고 싶은 욕망", "권한이 작동되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들이 최초의 보고서를 누더기로 만드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의사결정과정에 묻어있는 승진 욕심, 어디서 보고 들은 유치한 소문, 더 윗분의 이쁨을 받으려는 지레짐작, 챙겨줘야 할 사람, 은퇴한 선배의 부탁, 정치인의 은밀한 요구, 자기네 집 앞의 사정 같은 것들이 보고서를 누더기로 만드는 재료들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정치'까진 아니고 '정책' 비슷한 모습을 띤다. 이른바 비용대비 효용 (Benefit/Cost)이라는 근본적인 방향성을 벗어나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공무원이라는 부류들은 경력을 쌓아가면 쌓아갈수록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공무원 세계에서 튕겨져 나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성향이 강해지거나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고, 그런 경향성은 법률이나 지침 아니면 산하기관 등 무시해도 될 만한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을 몸에 익히게 만든다. 그러니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 덕분으로 정책이 아직은 정책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여기 정치가 개입한다. 중앙정치는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지방정치는 직접 만나봤다. 소위 의원이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문성은 믿을 수 없이 한심하다. 자기네들이 읽고 있는 보고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들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목표는 재선, 그러니 그들의 관심이란 재선을 위해 이른바 정책을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어떻게 쓸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투입 비용의 적정성이나 지역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투입 되지 않아도 될 예산을 억지로 끌고 오거나 어떨 때는 자기네 지역구의 청탁을 해결하거나 자기네 지역구 국회의원의 오더를 수행하기 위해, 어떨 때는 그저 개인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라고 하고 제도를 활용해 국민의 세금 집행이 바른 곳에 쏟아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정책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정책의 정치화, 내가 목격했던 비열하고 추잡스럽 지역정치의 모습이자 정책이 정치를 만나 무너지는 모습이다.
4. 도의회 업무 보고
기관장 업무보고가 끝나면 거의 수백 장짜리 보고서가 인쇄되고 의회 업무보고가 이어진다. 이미 기관장 업무보고 때 만든 자료가 있긴 하지만 의원들에게 보일 자료와 보이지 않아야 할 자료는 좀 정리를 해야 한다. 어차피 저치들 대부분은 보고서의 내용을 바로 읽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이 양반들의 불호령이 내릴 만한 요소들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앞뒤 숫자가 맞지 않거나 오타가 나거나 표가 예쁘지 않거나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부분. 다음으로 자칫 해당 의원이 관심 갖는 부분에서 그들 지역구를 안배했는지도 찾아야 한다. 지역이 특정 시인데 해당 시 지원내역이 없으면 내역을 아예 빼버리는 식이다. 없으면 묻지도 못하니까. 의원들은 자료 요구라는 방식으로 공세를 취하지만 안에서는 치열하게 그들이 알아먹지 못하도록 자료를 지우고 삭제하고 편집한다.
이어서 질의응답 자료도 작성해야 한다. 질문은 의원님네들이 하지만 답변은 기관장께서 하신다. 기관장 업무 보고는 시험을 앞둔 예습 복습이었다. 각 사업별로 치명적일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해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건데 우스꽝스럽다고 할 만 한건, 도무지 질의응답 자료라고 할 만한 게 아닌 걸 사업개요니 하는 걸 대충 붙여 넣기 해 보고서에 포함시키는 짓도 벌어진다는 거다. 이건 첫째, 일이 하기 싫고, 둘째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셋째, 팀장이나 본부장이 알아서 하겠지 싶다는 거다. 어떤 경우는 이런 엉망인 자료들도 스크리닝이 안 되고 최종 독회 자료로 붙는다. 독회라는 건 기관장에 대한 최종 족집게 과외 같은 거다. 기관장 업무보고때 했던 것처럼 본부장이며 팀장들이 들어가 이렇게 답변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이 과정이 참 재밌는데 실무를 잘 아는 팀장, 본부장이 권위와 갈굼으로 풀 무장한 기관장을 가르친다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조지더니 이번주엔 듣는다. 물론 성격 지랄 맞은 기관장은 배우면서도 난리다. 자료가 이게 뭐야? 이걸 나보고 답변하라고? 몇 년 있다 가시는 분 주제에 오래 있는 집주인들한테 똑바로 가르치라는 건데, 직원 하기 참 더럽게 어렵다.
의원들과 관계가 좋거나 영업이 된 좀 되는 사람들은 미리 의원들을 만나 기름칠을 해놓는다. 이 사업은 말입니다. 올해 예산은 말이죠. 필요하면 질문을 요구한다. 이걸 질문해 주시면. 어차피 의원들은 자기들에 뭘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고, 기왕이면 잘 질문해서 보도자료라도 한번 더 타면 좋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다. 반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출장비를 받고 나가든 외근 내고 나가 자기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든 아무튼 그들 나름 대로는 기관과 업무를 위한 영업활동이니까. 나도 누구 부탁을 받고 뭐가 잘 안 풀려서 억지로 의원 집 근처에서 내 돈 써가며 소고기 사 먹인 적이 있다. 그렇게 닦고 나니 한 달 동안 매일매일 무슨 자료를 내놓으라는 둥 하던 쪼임이 사라졌다. 안다. 이 바닥에선 자기를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상대를 어떻게 대접할지를 결정한다. 높은 분들은 머리를 숙이고 술이며 밥을 대접하고 웃기지도 않는 아부성 멘트로 썰을 풀면서 존경심을 보이는 연기를 해줘야 자기네들이 그만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불쾌감을 푼다.
자 이제 업무보고가 시작된다. 000 기관 업무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보고자료 00페이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000 기관은.... 정원은... 현원은... 000페이지 봐주시기 바랍니다. 주요 성과는.. 주요 계획은.. 000 등등.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업무 보고가 이어진다. 행정사무감사는 보통 기관 단위로 받기 때문에 기관의 본부장급 들 인원들이 발언대 뒤에 죽 서있지만 이 경우엔 보통 기관장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외로운 노인들. 그래도 비서실장 역할을 하는 기조실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없는 자리 끝에 쪼그려 앉아 수시로 업무를 보고하면서 쪽지를 던지기도 한다.
이제 의원들의 발언이 시작된다. 행정사무감사처럼 강도가 높진 않지만 힘들게 줄 대서 공천받은, 그러나 지역민들 대부분은 누구 지도 모르는 지역의원들이 자기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듣기로 이 양반들도 나름대로 당에서 돈도 안 주는데 지역구 사무실 가서 청소하고 국회의원이며 보좌관들 지저분한 일 처리하면서 힘들게 그 자리까지 가셨다고 한다. 국회 보좌진 출신들도 있고 국회의원 친구 알들 딸도 있고 지역 유지도 있다. 지역에 밀착돼 있고 출신학교를 공개하지 못할수록 대부분 전문성이 없고 멍청한 경우가 많다. 이 양반들 또 공통적으로 자기네들이 무슨무슨 협회 회장이니 뭐니 경력을 늘어놓는데 그 협회니 뭐니 하는 것들이 무슨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는지, 회원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사람들이 마이크 앞에 앉아 인상을 쓰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다룬다는 듯이 멋진 말로 우아한 체 참을 수 없는 말 그리고 참을 수 없이 멍청한 말들을 잘도 골라낸다.
전년도 예산 집행률을 봤더니.. 전년도 행정사무감사 처리 결과를 봤더니.. 이런 얘기 무척 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출신 학교도 밝히지 못하고 찾아보면 무슨 실내 포장마차 하는 사장님께서 근엄하게 "본 의원은.."으로 발언을 시작한다. 영상을 보면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본 의원이 지난 행정사무감사 때 지적했던 사항에 대해서 거듭 말씀드리자면.." 쟤는 지금 지가 뭔 말하는지 아나? 뭐 지적해야 하는지 알고 나온 건가. 자기가 보는 보고서가 뭔지 알고 하는 건가. 기관장은 겸손한 척 "예 존경하는 의원님, 지적해 주신 사항에 대해 저희 기관에서는.." 웃기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지적 사항은 거의 또는 전혀 보완되지 않았다. 의원이 사안을 잘못 이해하고 지적을 잘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 설사 적정한 지적이라 한들 기관은 그걸 고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 왜? 돈이 있는 기관은 의원들이 지적하든 말든 자기들 방식으로 할 것이고 돈이 없는 기관은 돈이 없어서 해결을 못한다. 그러니 해결은 보고서 속에만 존재한다. 이건 후에 다루겠다.
의회 업무보고는 약과다. 그래봐야 길어야 기관당 두어 시간 정도의 갈굼이 다니까. 진짜는 행정사무감 사다. 거의 두 달여 동안 회사가 멈춰진다. 어디서 뭐 하다 왔는지 모르는 지방의원들 비위를 맞추느라 한 달에 10억이 넘는 인건비가 들어가는 기관들이 일을 모조리 멈추고 오로지 여기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총체적 부실, 예산 낭비의 시간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