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게 구원투수의 역할을 기대하지 마라
오늘 학교 기자에게서 받은 인터뷰 질문을 받았다. 최근에 번아웃이 와서 글을 손을 놓은 지 오래였는데, 질문의 내용을 보고 단숨에 의욕에 차 펜을 들고 수첩에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질문은 “인문학이 현대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였다. 생각해 보면 다소 마음이 무거워지는 질문이었다.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고민과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일까. 실제로 나는 인문대 고고학과 학생이면서, 표현하자면 “야생적으로 “ 공부해 온 일종의 이단아였다. 고고학과 공부가 나와 영 맞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학기 중 가장 열심히 한 일은 학과 공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만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불량학생이란 모순 아닌 모순 속에서 학점은 제대로 나올 리가 만무하고, 나는 자기가 선택한 길이면서도 노력 대비 턱없이 부족한 보상에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아니, 아쉽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전에 내가 쓴 증오의 연쇄의 해부 칼럼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기는 게 이상적이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부재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내가 공부한 것들은 돈과 취업시장보다 다큐멘터리 채널을 볼 때 옆에서 스포일러를 하거나 철학 독서모임에서 아는 척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할 뿐이었다. 문득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추운 겨울날 지하철에서 글 파는 소년이 되어, 자기가 쓴 글을 태워가면서 추위를 달래다가 얼어 죽는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하니 웃음 아닌 웃음이 배시시 삐져나왔다.
아무튼 이러한 고민을 하던 차에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니,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감에 어려움이 없었다. 단순히 내가 느끼는 고민과 내가 가진 불만, 그리고 내 생각을 주절주절 적어서 그럴듯하게 엮어놓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다소 날로 먹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랜만에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행복하였다. 사실 몇 가지 질문을 더 받긴 하였지만 워낙 답변을 길게 쓰느라 진이 다 빠져 그만 내일로 미루고 말았다. 너무 글을 길게 썼나 싶으면서도 옛말에 일자천금이라 나름대로 내용은 만족스러워서 딱히 추가적인 편집을 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글을 카카오톡으로 전송하였다.
1-Q. 인문학이 현대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1-A. 저는 냉정히 말해 온전히 인문학만으론 현대사회에 기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 기피 풍조는 마치 나무의 뿌리가 썩으면서 잎이 말라가듯 사회가 더 이상 인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활동 없이 막연히 젊은이들에게 인문학 분야에 투신할 것을 강요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질문이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역할 자체가 사라져 가는 시점에서 그 역할을 논하기 이전에 “어떻게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경제입니다. 문제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한국에서 유독 심한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이 이 원리로 인해 불경기와 실업문제로 고통받고 있죠.
고학력 인재의 과잉공급, 극심한 화이트컬러와 블루컬러 직업의 질의 양극화 등의 요인으로 생산 가능 인력의 가치가 하락하자 자연스레 사회 전반에 실업문제가 발생하였고, 소시민들의 경제력이 하락하며 소비 시장을 위축시켜 불경기를 야기합니다. 이 악순환의 과정에서 의식주마저 앞가림하기 어려운 마당에 문화를 소비하려는 수요는 당연히 크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서브컬처 문화의 융성이나 인문학 콘텐츠를 향유하던 가족집단이 1인가구로 해체되고 OTT 스트리밍 서비스나 유튜브 쇼츠 등의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대세를 이루는 등의 부가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이 역시 앞서 제시한 경제 문제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니 금전적 부담이 적은 서브컬처 문화를 즐기고, 돈이 없으니 집을 구하지 못해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돈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을 줄이고 일하거나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에게 수요가 없는 인문학 분야의 진학 및 취업을 낭만의 이름으로 강요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 인문학적 교양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다소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꿈을 크게 가지고,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일종의 클리셰처럼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점차 성장하며 자신이 되고 싶었던 우주비행사, 화가, 고고학자 등의 직업을 쫓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큰지를 알게 됩니다. 인문학의 대표자 격이라 할 수 있는 문학, 역사, 철학은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인문학이 현대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줄지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논하는 게 더 적절해요. 그것은 작게는 지속적인 인문학 분야 일자리에 대한 투자일 수도 있고, 크게는 경제를 발전시켜 일자리를 창출해 문화 활동 수요를 이끌어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개개인이 아닌 나라의 역할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는 나라를 향해 이 질문을 돌려보내겠습니다. “당신들은 인문학에 종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고, 어떻게 쇠퇴해 가는 인문학적 가치를 지켜낼 생각이십니까?”
역시 너무 길었던 탓일까?… 기자는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아니면 내가 혼자 그렇게 느낀 걸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고생하는 것은 내가 아니기에, 난 후련한 마음으로 글을 복사해 브런치스토리에 붙여 넣었다. 글쓰기 소재도 생각 안 나고 스스로에 대해 지쳐있던 차에 오늘은 꿩 먹고 알 먹는, 뭐랄까 날로 먹기 위해 노력한? 그런 하루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이 칼럼의 표지는 평소에 내가 하는 글쓰기 자료들이다. 나는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사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에 한번 넣어보았다.